[독서에세이] 두루미의 불안과 방황

초등학교 입학을 1∼2년 앞둔 어느 날, 집안 형님이 한문 식의 왼쪽방향 횡서로 가갸거겨 표를 쓰시고 소나무 여린 가지로 연필보다 조금 굵은 지시봉을 다듬어 주셨다. 얼마가 지났을까, 산골 초가집 웃방 바닥에 벌렁 누우면 천정에 덕지덕지 찢어 바른 잡지나 신문지의 글자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이 잡힌 첫 읽을거리는 지금 짐작컨대 선친께서 배우셨던 왜정 말 간이학교 조선어 말본의 ‘박혁거세 탄생 설화’와 단발 ‘비양기’[비행기] 이야기였다. 그 다음엔 아랫집 아저씨에게서 김성환의 ‘만화 삼국지’를 조르고 졸라 얻어 등잔불 밑에서 삼키듯 읽었다.

방정환 동화집과 학원사의 세계명작 시리즈에 사로잡혔던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 1학년 때 김자환 외숙께서 선물하신 『테스』로 다시금 밤을 새웠다. 이번엔 두 가지 사연으로 가슴을 졸였다. 테스의 운명이 안타까워서 그랬고, 책 표지에 벌거벗고 서 있는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부모님 눈에 띌까봐 창피해서 그랬다. 책을 주신 분이 뮌헨 유학 중 남부 티롤의 알프스에서 실족하여 우리 곁을 떠나자, 고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주변의 거센 만류를 뿌리치고 지망 전공을 바꿔 1966년 3월에 독문학도가 되었다. 입학시험에 독후감을 영어로 쓰라는 문제가 나왔는데, 주저 없이 ‘테스’를 제목으로 잡았다. 유학 시절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서 ‘비너스의 탄생’ 원본을 보고 여신보다 먼저 테스가 떠오른 것도 필시 사춘기 시골 소년의 뇌리에 각인된 아름다움의 비극성, 훼손당한 생명력의 무망한 저항 때문이었을 것이다.

▲ © 강동환 기자

대학생이 된 나는 ‘누구에게나 고유한 죽음’을 기원하는 릴케의 시에 공감하고, 토마스 만의 나약한 예술가 상에 감정을 이입하고, 방황하는 베르터와 파우스트를 자신으로 느끼며 고달프고 어리석은 4년을 보냈다. 마지막 학기에 강독한 『사천의 선인』이 뇌리에 남았다가, 군대생활 후 대학원 첫 학기에 동숭동의 마로니에 옆 빈터에서 석유 적신 솜뭉치로 불 밝히고 구경한 봉산탈춤에 겹쳐져 보였다. 그때는 이두현 교수의 『한국가면극』을 비롯한 주요 관련 도서를 모두 살 수 있을 만큼 책값도 넉넉해져 있었다.

테스에서 말뚝이까지 저들이 아직도 나를 지탱하는 동경과 도전을 길러 준 것 같다. 그 속을 휘저어보니 ‘생명’이라는 낱말이 머리를 내민다. 생명체는 우선 만물을 납작하게 굴복시켜 원소로 해체해 버리는 지구중력에 거역해야 하고, 그러기에 삶은 숙명적으로 도전이고 방황이다. 노학자 파우스트가 부활절 산책에서 석양을 보며 새삼스레 삶의 원초적 동경에 사로잡힌다. “감정이 하늘 높이 앞으로 치닫는 것은 / 누구나 타고난 천성이 아니던가. / 치솟은 가문비나무 꼭대기에 / 독수리 날개 펼쳐 맴돌고 / 벌판을 지나 호수 너머로 / 두루미가 제집 찾아 날아갈 때면.” 고향을 찾는 이 두루미가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에서는 한쪽 날개가 마비된 모습으로 어린 시절 셴테의 집에 주저앉았다. “두루미는 우리가 놀려도 싫어하지 않고 우리 뒤를 성큼성큼 따라 들어오면서, 자기에게는 우리 걸음이 너무 빠를 것 없다고 소리 질렀죠. 하지만 가을과 초봄에 철새 무리가 마을 을 지나갈 때면 녀석은 몹시 초조해졌어요.” 여기 날지 못하는 두루미는 현대의 실업자 지식인을 가리키며 괴테의 독수리와 두루미, 곧 노력하며 방황하는 이상화된 인류의 대변자 파우스트를 은근히 조롱하지만, 날아오르려는 생명의 원초적 의지까지 부인하지는 못한다. 불안과 방황은 생명의 표징이요, 안정과 휴식은 죽음의 속성이다.

외국문학을 천직으로 삼은 나는 두 개의 고향을 가지게 되었고, 그만큼 방황도 두 배로 치열해야 하는가보다. 첫 개안의 순간에 눈에 들어온 박혁거세의 탄생과 단발 비행기의 비상 그 범주에서 나는 아직 벗어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벗어날 수 없으리라. 괴테와 브레히트의 두루미처럼 날아오르려는 생명의 섭리와 의지가 동서양을 아울러 거기에 있었으니까.

임한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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