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이 유행어다. 지속가능성, 친환경, 생태 같은 유사어 역시 세월 만난 중요어다. 그러나 ‘녹색’은 우리 기대같이 속히 푸르러지는 것이 아니다. 급한 마음에 학교, 아파트 단지 등에 큰 나무를 옮겨 심지만 그것은 ‘녹색’을 구현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녹색’은 지구환경을 개선하고, 후손이 우리에게 고마워할 ‘녹색’이다. 부동산 가치를 상승시켜 조속히 개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큰 나무를 옮겨 심는 일, 공산품 매출이나 개발 이익을 높이려는 판촉 일환으로 친환경이나 생태로 포장하는 일은 의사(擬似) 녹색, 의사 친환경, 의사 생태 아닌가?

관악캠퍼스에 큰 느티나무를 옮겨 심었으나 안타깝게 죽고 말았으며, 그 자리에 먼저보다는 작은 느티나무를 다시 심었으나 큰 가지가 말라 죽는 등, 나무는 고초가 크다. 나라 곳곳에서는 큰 소나무 옮겨 심는 것이 유행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 ‘녹색’ 사업이 아니다. 강원도에 있는 가슴높이 직경 35cm, 나이 30년 된 큰 소나무를 중장비를 동원하여 서울 아파트 단지에 옮겨 심고, 그 중 약 19%는 죽어서 교체하여 심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소나무는 50년을 더 생존하여 80세 수령을 누린다고 가정하자. 이 소나무가 강원도 제자리에서 살아가면서 여생동안 흡수할 탄소량보다 더 많은 탄소량을 옮겨 심는 과정에서 발생시킨다는 분석 결과이다. 아파트나 도시를 녹색으로 가꾸는 것이 아니라 탄소발자국만 키우는 것이다.

한편 루즈벨트의 뉴딜사업은 ‘녹색’의 의미를 잘 가르쳐준다. 대공황으로 다수가 실업, 경제파탄, 굶주림에 시달리던 1933년부터 1942년까지 10년 동안 340만 명의 자원입소자를 모아 600여 개소 캠프에 수용하면서 나무 30억 그루 이상을 심었다. 그래서 루즈벨트의 ‘나무 심는 군대’라 불렀다고 한다. 가장이 실직한 가정 젊은이들이었고, 월급 30달러를 지급하되 25달러는 집으로 송금하여 가족 생계를 잇도록 하였다. 왜 오늘날도 루즈벨트를 논하는 것일까? 70년이 지난 지금, 당시 헐벗은 곳에 나무를 심은 수 백 곳이 울창한 숲, 아름다운 주립공원이 되어 있고, 토양과 물과 야생동물 등등 훌륭한 생태환경을 손자들에게 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큰 소나무 옮겨심기 같은 ‘녹색’ 아닌 녹색 사업이 벌어질까? 성장 지향 조급증과 ‘녹색’으로 포장한 경제성 추구, 기술만능 사고가 원인일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사고와는 거리가 있고, 큰 것이 더 돈이 된다는 ‘거대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다. 개발 전문가 잘못이 아니고 소비자와 맞장구치는 결과물이다. 그래도 우리 같은 전문가 잘못과 책임이 더 크다. 왜냐하면 전문가이니까. 전문가의 윤리성 결여, 시장(市場) 비위맞추기가 엿보인다.

우리는 모두 다 안다. 후세대가 고마워할 녹색 발전을. 온갖 핑계를 찾아 외면할 뿐이다. 반대로, 큰 집, 큰 차, 더 편리함, 더 안락함을 얻기 위해 경쟁한다. 행복은 소비증대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음을 모른다. 나라별 소득수준과 행복지수 비교표를 보면 안다. 이천 년 전 선조는 백제 문화를 “검이불루(儉以不陋), 화이불치(華以不侈)”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하지 않았다 했다. 온조왕 궁궐지은 모습을 평한 것이란다. 탄소발자국이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이 작았을 선조가 검소와 사치하지 않음의 미학을 가르치고 있다.

대다수 학자들 예상에 따르면 지구환경 파탄은 길어야 수백 년 이내에 찾아온다. 자원 쟁취, 생존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생물학적 관성은 수천 년, 수만 년 지나도 변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진정한 ‘녹색’ 실현은 불가하리라는 절망과 마주치지만, 그래도 만나보지도 못할 미래 손자들을 생각하며 작은 집에서 살고, 작은 차를 타고, 낡은 옷도 오래 입고, 전등 하나라도 끄고, 냉난방 줄이고, 이면지 쓰고, 분리수거 잘하고, 그러면서 이런 생활 자세가 멸시 도태당하지 않고, 오히려 경쟁적 과시소비 세태를 이기고 확산되는 꿈을 꾼다.


안동만 교수
조경ㆍ시스템공학부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