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백가흠 소설가

김형중 문학평론가는 “피학적 헌신, 가학적 폭행, 강간, 신성모독 등이 백가흠의 주인공들이 주로 택한 사랑의 방식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펑가와 대조적으로 직접 만나본 백가흠은 차분한 분위기에 친절하기까지 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그는 2001년 「서울신문」신춘문예에서 「광어」로 등단했으며 『귀뚜라미가 온다』, 『힌트는 도련님』 등의 단편집을 꾸준히 써온 중견작가다. 그리고 지난2012년 등단 12년 차를 맞아 그는 첫 장편소설인 『나프탈렌』를 발간해 탄탄한 작품성으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특유의 작품 분위기로 ‘소설계의 김기덕’으로 불리는 그는 “예전에는 달갑지 않았지만 김기덕 씨가 상을 받으신 후로는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사진: 주현희 기자 juhieni@snu.kr


‘짐승 같은 인간’들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권위의식, 패륜, 반인륜적 범죄 등 ‘비인간성’에 주목해왔다. 그는 “오늘날 사회는 시스템의 발전을 통해 편리한 삶을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인간성은 오히려 타락한 것 같다”고 평했다. 그의 초기작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극단적으로 강조되며 인간성을 잃고 ‘동물성’만을 지닌 ‘짐승 같은 인간’들이 등장한다.

단편집 『귀뚜라미가 온다』의 수록작인 「배꽃이 지고」에 등장하는 과수원집 ‘주인 사내’가 바로 그런 인물 중 하나다. 주인 사내는 절대적 권위를 바탕으로 장애를 가진 자기집 식구들에게 잔인한 학대를 거리낌없이 행사한다. 사내는 부인이 보는 앞에서 정신지체 장애인인 ‘여자’를 강간하고 여자의 아이를 죽인 후에도 죄책감 없이 사체를 땅에 파묻는 등의 반인륜적인 모습까지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서 방영됐던 실제 사건을 통해 이 작품의 모티프를 얻었다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비인간적 폭력성을 극단적인 픽션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병출씨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지게에 늘어진 아이를 지고 뒤를 따릅니다. 칠흑 같은 밤, 한치 앞도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중략)… 병출아, 사람이 죽으면 어떡혀? 묻어야지? 이게 순린겨. 우리 둘이 착헌 일 하는겨.(『귀뚜라미가 온다』 중 「배꽃이 지고」)

작가는 “한때 이런 비인간적인 모습이 ‘남성’에게서 기인한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남성들이 성(性)이나 정치에 대해 갖고 있는 판타지 등이 세계를 망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초기 단편작에서는 남성이 여성에게 휘두르는 가학적 폭력이 주로 묘사되며 남자가 가지고 있는 판타지가 인간성을 훼손시킬 수 있음을 강조해왔다.

중년은 주먹으로 사정없이 여자에게 린치를 가한다. 막 감이 손에 들어오려는 찰나, 위에서 밧줄이 내려온다. 여자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펑펑 쏟아지는 눈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다. 중년은 어느새 목장갑을 끼고 있다.(『귀뚜라미가 온다』 중 「밤의 조건」)

그는 자신의 초기작들을 ‘동물적인 인간사(人間事)’라는 말로 정리한다. 극단적인 인물들의 폭력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만연해있는 ‘비인간성’을 폭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첫 장편 『나프탈렌』에서는 기존 단편들과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증오에서 연민으로

『나프탈렌』은 ‘죽음을 앞둔 인간들의 단상’을 다룬 작품으로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면서 단편적으로 서술되는 구성을 취한다. 이런 방식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는 것을 넘어 그 원인까지 추적하고자 했다. 그가 이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재고(再考)한 계기는 ‘슬럼프’ 때문이다. 그는 “28개의 단편 소설을 펴낸 시점에 이르자 더이상 무엇을 써야할지 몰랐다”며 “슬럼프를 겪으며 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봤다”고 고백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메타소설 등 기존과는 다른 작법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이는 세번째 단편집인 『힌트는 도련님』에서 두드러진다.

슬럼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는 비인간성의 원인으로 ‘과거의 균열’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개인에게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정신적 상처를 남기는 사회·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한 사회에 비인간성이 나타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의 경우 한국전쟁, 독재정치,산업화, 민주화, IMF 경제위기를 통해 급격한 변화를 겪어왔다. 작가는 “과거의 급격한 변화를 목격한 개인이 현재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고민해봤다”며 “현재 기성세대들에게 보이는 비인간적인 모습이 과연 이들의 탓만일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나프탈렌』에서 ‘백용현’은 이런 고민이 반영된 인물이다. 백용현은 젊음에 대한 집착, 성적 도착증, 권위적인 모습 등을 보이는데 작가는 “이를 통해 기성세대에게서 볼 수 있는 인간성 훼손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설을 돌아보면 백용현의 훼손된 인간성은 온전히 그의 탓으로 돌리기 어려우며 유년 시절 겪은 한국전쟁에 그 근본적 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섯 살, 그는 아버지의 시체 옆에 서 있었다. 어머니는 피범벅인 아버지를 껴안고 울부짖었다. 어린 그의 눈에는 피 흘리며 죽은 아버지의 모습이 괴물처럼 보였다. …(중략)… 시간이 오래도록 흐르고, 세월의 기억이 망각 속으로 몰아넣어도 죽은 아버지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나프탈렌』)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백용현은 이후의 삶에서도 죽음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느끼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젊음과 성에 집착하게 된 것으로 그려진다. 이처럼 작가는 비인간성의 원인을 개인의 문제에 귀결시키던 이전 작품과 달리 사회·역사적 측면을 고려하며 비인간성을 조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적 요인으로 인간성이 훼손당한 백용현 같은 인물들에 대해 작가는 연민의 정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예전에는 비인간성 자체에 문제의식을 느꼈지만 이제는 그들을 이해하고 싶다”며 “백용현의 개인사가 정말 개인사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무릎을 꿇고 울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생각났다. …(중략)… 그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죽어있었다. 마치 나무로 빚은 조각상 같았다. 그가 죽은 뒤에도 머리카락은 자라서 얼기설기 뻗쳐 있었다.(『나프탈렌』)

이에 작가는 백용현이 인간성을 일부 회복하는 것을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그려냈다. 백용현이 젊음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동안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 지은 것이다. 다만 작가는 “백용현의 죽음이 ‘위대한 성찰’처럼 거창한 것은 아니다”며 “그저 자기 자신을 한번 돌아본 것뿐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현재 기성세대들에게 그저 한번이라도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이전 작품에서 드러냈던 ‘비인간성’에 대한 작가의 증오심이 『나프탈렌』에서는 연민으로 바뀐 것이다.

인간다운 인간을 기대하며

그는 “작가가 가질 수 있는 주제의식은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다”며 “나 같은 경우는 비인간성에 대한 주목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비인간성을 표현해온 것은 그만큼 ‘인간성’을 갈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성의 본질이란 약자들이 겪는 고통과 가난 등을 진심으로 공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그는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비인간성이라는 도구를 사용한 것이다.

또 ‘비인간성’이라는 것이 사회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고 보는 만큼 그는 창작활동 외의 방식으로도 정치·사회적 문제의식을 지속적으로 표출해왔다. 진보적 젊은 작가들의 모임인 ‘작가행동1219’를 주도적으로 조직하고 쌍용자동차 문제, 강정마을 문제 등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도 꾸준히 발언해온 그는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스스로 비겁한 것처럼 느껴진다”며 책임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올 여름 나올 장편소설과 겨울에 나올 단편집 등 그의 차기작에서도 이와 유사한 주제의식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두번째 장편인 『향』은 「웹진 문지」에서 이미 연재를 마친 상태며 이는『나프탈렌』의 연장선상에 놓을 수 있는 작품이다. 『나프탈렌』이 죽음을 앞 둔 인간들의 모습을 담았다면 『향』은 사후세계에서 망자(亡者)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작가는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곳에서도 이승에서의 비인간성이 그대로 반복되지 않을까”라며 “죄와 벌, 선과 악, 희생 등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담아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구원’을 주제로 하는 세번째 장편을 내년 중 발간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그가 생각하는 인간성인 ‘전인류적 형제애’가 종교를 통해 실현되는 모습을 그릴 예정이라고 했다.

백가흠에게 “쓴다는 것은 숙명”이라 했다. 한때 그는 글쓰기가 싫어져 연락을 끊고 도망간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여유를 얻었다고 한다. 인간들이 ‘짐승’이 아닌 인간다워지기를 고대하는 그가 ‘인간다움’을 통해 ‘구원’받는 인간의 모습을 어떻게 그려낼지 기대된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