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도 소개되었던 봄 대동제의 타이틀 ‘지겹지 아니한가, 청춘노릇’을 보면 첫눈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일찍이 이번 축제 내용은 축하사 SNS 페이지와 스누라이프 커뮤니티 등을 통해 학우들에게 홍보가 되었고 뜨거운 호응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왜 이런 문구와 이벤트가 통쾌함을 주었을까? 우리는 이 시대 청춘 멘토들이 던져주는 문구에 위로받지 못했다. 아직 납득하지 못했다. 청춘은 응당 아픈 것이며, 쉬이 천 번의 흔들림을 부과해도 되는 대상인가. 학생잔디에서의 흔들기 이벤트는 그런 물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사회 면에 실린 청년 논객 한윤형 씨와의 인터뷰는 그런 고통을 감내하는 모습만으로 묘사하기에는 좀 더 복잡한, 우리 세대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스타 멘토가 아닌, ‘청춘을 향한 청춘의 위로’라는 점에서 더욱 관심이 간다. 한윤형 씨는 20대 문제가 진취적이지 못한 잉여로운 인성을 규탄하는 조류로 이어진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좀 더 구조적인 면에서 접근하길 바랐다. 386세대의 뒤를 이으며 껴안게 된 하락한 노동 가격, 문화를 소비하며 자랐기에 더더욱 교묘하게 착취당하기 쉬운 ‘열정 노동’ 등에 주목했다. 청춘의 방황을 그 유약함과 유예하는 속성으로 돌리기엔 꺼림칙한 면이 많다. 그가 얘기했듯 우리가 사회 속에서 어떤 위치를 갖고 있는지 파악하면, 자연히 우리의 고통이 우리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청춘의 고통은 당연하지 않다.

인생 선배의 따뜻한 조언은 언제나 귀담아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무비판적으로 수긍할 필요도 없다. 감사히 듣되, 가려들어야 한다. 기사에 인용되었던 책의 한 대목이 알려주듯, 아름답게 들리는 꿈도 무턱대고 꾸다 보면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잔인한 덫이 될 수 있다. 천 번을 흔들리며 맷집을 키우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볼 문제다.

정예련
작곡과·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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