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의 역사적 구조와 대중의식, 그리고 과거사 인식
‘점령’의 역사적 구조와 대중의식, 그리고 과거사 인식
  • 대학신문
  • 승인 2013.05.25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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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세이] 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탈냉전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역사전쟁과 기억투쟁이 빈발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동영상 「백년전쟁」을 둘러싸고 국내적으로 논란이 일고, 일본에서는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을 지향하는 아베 신조 총리가 역대 정권이 계승해 온 무라야마 담화의 역사인식을 대전환한다는 방침을 표방한 상태에서 정치가들과 관료들 사이에서 연일 망언이 쏟아지고, 그것이 주변국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아베노믹스’를 내걸고 집권에 성공한 아베 총리는 경제 살리기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기대감으로 70%를 웃도는 지지율을 얻고 있지만 극약처방인 아베노믹스는 경기회복 효과가 가시화되기 전에 물가상승으로 생계를 압박하는 부작용을 먼저 나타낼 위험성도 있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자학사관(自虐史觀)’의 수정이라는 사명감을 숨기지 않는 터라 영토분쟁과 역사인식을 둘러싼 주변국과 갈등이 계속될 전망이다. 현시점에서 일본의 우익 정객들이 극복하고자 하는 전후체제와 이른바 그들이 명명한 자학사관은 어떻게 형성됐고, 왜 그들은 아시아 국가들과 긴장을 유발하면서까지 역사분쟁에 매달리는 것일까?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원형의 시기인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미군 점령 하의 일본 사회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존 다우어는 패전과 개혁을 일본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고, 점령되기 전의 일본 사회와 점령 정책이 만나 형성된 구조가 전후 일본 사회를 어떻게 규정했는가를 묻고 그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저자는 흔히 일본의 고유한 특질을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전후 일본 모델이 사실은 일본과 미국의 교배형 모델이라는 의미에서 ‘스캐파니즈(SCAPanese) 모델’로 불러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SCAP은 연합군총사령부를 뜻하지만 사실은 맥아더 장군을 정점으로 한 미군정을 의미한다. 즉, 일본의 재기는 ‘위로부터의 혁명’이고, 1945?52년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면서 군국주의 일소와 민주화를 위한 개혁정책이 시작됐지만 일본의 전후개혁은 자발적인 개혁이 아닌 ‘강요된 개혁’이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미 점령군은 천황의 신격화를 폐지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입헌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았지만 동시에 이 시기는 점령군이 모든 정치·사회 활동을 통제하고 검열하는 제한적 민주주의의 시대였다.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며 일본 경제는 ‘전쟁 특수’를 맞게 되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경제 발전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전시 일본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보수적인 관료주의 사회의 원형은 미군 점령기에 오히려 강화되었고, 전후 일본에서 줄곧 유지되었다. 관료제 자본주의, 천황제 민주주의와 같은 유산은 결국 이 시기 승자와 패자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낳은 결과였다.

이 책은 ‘위로부터의 혁명’이 일본 모델로 구조화되고 정착하는 과정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껴안은 민초의 삶과 대중의식(popular consciousness)을 보여줌으로써 만화경처럼 다채롭고 변화무쌍했던 점령기 일본인들의 동태를 손에 잡힐 듯이 그려내고 있다. 저자는 사회문화적 측면에 초점을 맞춰 일본인들이 패전을 어떻게 끌어안았는가를 일본 사회 내부로부터 그려 보이고, 또 중요한 정치경제적 사안들도 민중 동향, 사회 여론, 문화적 기표 등과 결부시켜 서술한다. 이 책은 민초의 생명력에 주목하면서 점령기 일본사회를 승자와 패자, 절망, 혁명, 민주주의, 죄악, 재건 등의 열쇳말로 설명한다. 저자는 패전 후 일본 사회가 겪은 혼란과 굶주림, 그리고 그에 따른 교다쓰(허탈)상태를 다루면서 동시에 일본인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조소와 풍자, 노랫말 등을 통해 문화적으로 이겨내는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당시 일본 사회의 역동성을 적극적으로 해석해내고 있다. 저자는 민초들을 포함한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의식과 활동에까지 서술의 폭을 넓히고, 그것들을 들춰냄으로써 무미건조해지기 쉬운 역사 해석에 역동성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성공했다.

저자는 점령기 일본을 다루었지만 그 시기 일본 역사가 미일관계나 일본 내부의 역사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을 예리하게 의식하고 있다. 저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 전후체제의 한계를 센프란시스코체제의 한계로 언급한다. 저자는 미국과 단독 강화를 계기로 일본은 미국에 전면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아시아에서 분리됐지만 정작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으로 가장 피해를 받은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한계가 지금에 와서 영토분쟁과 과거사 문제로 돌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고통받은 한국인, 중국인, 대만인 등 다른 아시아인들이 전후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다시 차별받고 배제되는가에 대한 서술을 빠트리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역사인식의 충돌이 그 시점부터 배태됐음을 암시한다.

4월 초순, 화창하지만 봄답지 않게 바람이 찬 날 영화 ‘지슬’을 보았다. 영화가 주는 잔상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쉽사리 감정 처리가 안되는 무거운 영화였다. 제주4·3사건이 배경인 이 영화는 군과 경찰의 중산간 지구 민간인 소개 과정에서 일어난 학살이 그 소재다. 2차대전 종전 후 일본과 남한은 똑같이 미군 점령으로 전후를 시작했지만 일본 사회는 점령 종식을 6·25전쟁 특수로 인한 경제부흥으로 맞았고, 남한은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등과 같은 내부 갈등과 폭력사태로 맞았다. 그것은 다시 전쟁과 분단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했다. 똑같이 미군 점령 하에 있었지만 어째서 점령의 출구가 이렇게 서로 달랐는가? 존 다우어의 책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해답을 찾아 들어갈 수 있는 역사적 배경지식을 제공해준다. 또 이 책은 미군 점령기 일본의 역사를 어느 한 목소리에만 의존해서 서술하지 않고 다양한 목소리들을 통해 들려줌으로써 특정 시기의 역사가 기억으로 정착되는 메커니즘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데, 이 점은 역사 이해에서 편협한 시각과 이념적 해석이 지배적인 한국 사회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점이다. 어쨌든 역사학의 목표가 자신의 이해 방식과 자신의 역사 자체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할 때, 이 책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기억전쟁의 역사적 연원과 현재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정용욱 교수(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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