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 아티스트 낸시랭,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웬일인지 그녀의 어깨 위에 마스코트처럼 항상 얹어져 있는 흰 고양이 인형 ‘코코샤넬’이 보이지 않았다. 낸시랭은 “우리 코코를 목욕시키느라 깜박하고 두고 왔어요”라며 다시 집에 가서 ‘코코’를 데려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낸시랭의 어깨에 흰 고양이 인형이 제자리를 잡은 후에야 인터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카메라를 들이대자 고양이를 어깨에 올린 후 능숙하게 포즈를 취하는 그녀의 동작은 매끄러웠다. 사진기자의 하나, 둘, 셋 소리에 맞춰 ‘앙’ 소리를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사진: 신선혜 기자 sunhie4@snu.kr

◇‘팝아티스트’라고 불러주세요=필리핀에서 국제학교를 졸업한 낸시랭은 홍익대 미대 서양화과를 나와 석사과정을 밟던 중 2001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 퍼포먼스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고 그 후 아트디렉터, 패션모델 등으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홈쇼핑 진행, 방송 MC로도 활동하며 올해엔 <낸시랭과 강남친구들>이라는 타이틀의 개인전을 열었다. 최근 미디어워치 변희재 대표와 트위터에서 벌인 설전으로 ‘이상한’ 유명세를 타기도 한 그녀는 이번 인터뷰에서만큼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싶다고 했다. 이러한 요청에 따라 낸시랭이 말하는 그녀의 예술과 삶에 집중해서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말하는 도중 일베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먼저 드러내는 데서 최근 그녀의 ‘정치적’ 행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을 ‘팝아티스트’라고 규정했다. 사람들은 연예·오락프로그램에 비춰진 자신의 독특한 발언이나 행동들을 보고 ‘예술가의 이름을 내건 연예인’라고 비판하지만 실제론 2008년도를 제외하고 매년 개인전을 열어왔을 정도로 작품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팝아트는 현대미술 중 가장 대중과의 소통이 활발하고 상업적인 장르에요. 가볍고 위트 있으면서도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죠.” 실제로 그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터부요기니 시리즈’에는 애니메이션과 로봇 건담, 명품 가방과 같은 대중문화적 요소들이 등장한다.

또 낸시랭은 루이비통과 비디오작업을 했고 쌈지에 ‘낸시랭 라인’을 출시해 패션쇼에서 퍼포먼스를 펼치는 등 기업과의 콜라보레이션 활동도 했다. 그녀는 대구 동아백화점엔 아예 ‘낸시랭 뮤지엄’을 만들고 ‘소비자가 곧 관람객’이라며 예술과 명품의 경계를 허물겠다고 외쳤다. “명품 브랜드는 고유의 역사와 장인 정신을 갖고 있어요. 그 가치를 높이기 위해 아티스트의 영혼을 샀다고 볼 수 있죠. 결과는 어마어마한 매출로 이어지구요.” 이렇게 낸시랭은 예술가도 상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은 돈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 ‘루이비통은 맛있어’나 ‘I LOVE DOLLAR’를 예시로 들었다. “예술을 한 결과가 당연히 돈으로 환산돼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예술은 고상한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미술계도 뒤로는 돈을 많이 버는 작가를 부러워하고 있지 않나요?”

◇힘들어도 낸시랭답게!=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논란과 인터넷에 넘쳐나는 악플에도 당당하고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낸시랭. 그녀에게도 힘든 순간이 있었을까.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로 자라났던 낸시랭은 대학 졸업 즈음 어머니의 암투병과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미국 예일대에 진학하려던 목표는 일찌감치 접어야 했고 어머니는 취업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낸시랭은어릴 적부터 싸인 연습을 할 정도로 자신이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리라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대학원생 시절의 ‘초짜 예술가’는 갤러리에 전시공간을 빌려달라고 끈덕지게 매달린 결과 동기들 가운데 가장 먼저 개인전을 열었다. 세계의 쟁쟁한 아티스트들이 모이는 베니스 비엔날레로 초청장도 없이 무작정 날아가 빨간 란제리를 입고 퍼포먼스를 펼치는 과감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두번째 슬럼프는 2008년에 찾아왔다.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이후 매년 열던 개인전도 열지 않았고 오열하다가 지쳐 잠드는 날이 2년 넘게 지속되었다. 공황장애 판정까지 받았다는 그녀는 사실 아직도 그때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다 지나가리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아팠던 시기를 지나니 어느새 제가 성숙해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끝나지 않은 낸시랭의 ‘실행’=아트에 ‘올인’하며 살아왔다는 낸시랭은 20대부터 55세까지를 삶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시기로 꼽았다. 그녀는 좌우명인 ‘Just be yourself and go for it’을 언급하며 35년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나만의 꿈을 이루기도 아까운 시간에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타인의 삶을 살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명품을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는 그녀지만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명품을 소비하는 행태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온전하게 내 의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데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어요?” 그녀는 꿈을 설정하고 그것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부와 명예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말한다. “꿈은 누구나 꾸지만 그걸 밖으로 실행하는 사람이 기회를 잡을 수 있어요.” 그녀는 2010년 펴낸 자서전의 제목이기도 한 ‘난 실행할거야’를 특유의 손동작과 함께 야무지게 외쳤다.

한편 낸시랭은 대학생 때 꼭 해봐야 할 일로 ‘해외여행’을 꼽았다. 시야를 넓혀야 꿈도 크게 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돈이 없다면 부모님이나 친구에게라도 돈을 빌려서 떠나라고 강조했다. 여행을 가서 무엇을 할지, 어떻게 빌린 돈을 갚을지를 계획서로 작성해서 설득하라는 것이다. “‘여행후기를 책으로 내서 인세의 몇 %를 주겠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매달 20만원씩 갚겠다’ 이런 내용을계획서에 적으세요.” 사회에 나가는 순간 어떤 일을 하던 계약서를 작성하게 되니 미리 경험해보라는 것이다. “정 돈이 문제라면 국내여행이라도 떠나세요. 대학생 시절이 아니면 여행갈 여유도 없어요.”

“저는 반 고흐의 작품은 사랑하지만 그의 삶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가장 존경하는 예술가 피카소처럼 살아 있는 동안 대중에게 사랑받고 싶다고 말한다. 2010년 ‘거지여왕’ 퍼포먼스에서 낸시랭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생일 퍼레이드에 나타나 구걸통을 흔들며 외쳤다. “자, 사랑이 가득한 UK 낸시랭 왕국이 탄생했습니다. 제가 그 나라 여왕이에요!” 낸시랭이 훌륭한 ‘예술가’인지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를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전 세계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파하는 아티스트’라는 꿈을 향해 앞으로도 무언가를 ‘실행’해 나가리라는 것은 확신해도 되지 않을까? 

▲ 사진: 신선혜 기자 sunhie4@snu.kr, 삽화: 전수만 기자 nacer8912@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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