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나라 스페인, 둥근 공에 웃고 울다
축구의 나라 스페인, 둥근 공에 웃고 울다
  • 이정원 기자
  • 승인 2013.05.26 0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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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혹은 축제 지난 17일 마드리드에서 국왕컵 결승전을 앞두고 거리 응원전을 벌이는 팬들의 모습. 양 팀 팬들은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나뉘어 기 싸움을 벌였지만, 표정만은 모두 밝았다.         

◇뜨거운 5월의 축제=지난 17일(금) 스페인 마드리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에도 도시에는 긴장 섞인 활기가 감돌았다. 곳곳에서 겉옷 안에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이날은 스페인 프로축구 국왕컵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특히 올해는 마드리드를 연고로 하는 두 팀,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결승에서 만났다. 8만여명이 경기장을 찾았고, 표를 사지 않은 시민들도 삼삼오오 바르(bar)에 모여들었다.

경기가 3시간 앞으로 다가오자 경기장 인근에서 엄청난 함성이 들려왔다. 양 팀 팬들의 장외 응원전이 시작된 것이다. 경기장 북쪽에는 아틀레티코 팬들이, 남쪽에는 레알 팬들이 자리를 잡았다. 폭죽과 홍염이 터지는 가운데 노래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

경기 뒤에는 승리 팀만의 축제가 이어졌다. 연장전 끝에 아틀레티코가 2대1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조용히 자리를 떠난 레알 팬들과 달리 아틀레티코 팬들은 요란한 뒤풀이를 시작했다. 환호와 노래와 맥주. 14년간 이겨보지 못한 라이벌을 꺾어 더 감격스러운 승리였다. 환호와 경적 소리가 마드리드 시내 곳곳에서 밤새도록 들려왔다.

이틀 뒤인 19일 스페인 북서부 라 코루냐 시의 분위기는 보다 비장했다. 이곳을 연고로 하는 축구팀 데포르티보가 2부리그로 강등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2년 전 데포르티보가 강등됐을 때는 ‘도시 전체가 울음바다에 잠길 정도'였다고 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3만 5천석 경기장을 가득 채운 팬들이 “Si, se puede(그래, 할 수 있어)!”를 연호했다. 그들의 응원에 힘입어 데포르티보는 에스파뇰을 2대0으로 꺾고 위기에서 한걸음 벗어났다.

이처럼 스페인에는 매주 소몰이 축제나 토마토 축제 못지않은 작은 축제가 벌어진다. 바로 프로축구 리그 ‘프리메라리가’ 경기다. 프리메라리가는 유럽축구연맹 리그 순위에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독일 분데스리가를 제치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스페인 대표팀도 유로2008, 2010년 월드컵, 유로2012를 모두 석권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는 중이다. 많은 전문가가 현재의 스페인을 역대 최강으로 꼽을 정도다.

축구는 투우, 플라멩코와 함께 스페인을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 잡았다. 자연히 이를 체험하려는 여행객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FC 바르셀로나의 깜 노우 등 주요 경기장은 여행객이 즐겨 찾는 명소다. 축구 경기장이 옛 궁전이나 성당 못지않게 팬들에게는 꼭 방문해야 할 ‘현재 진행형 성지’가 된 것이다.

열정적인 팬은 세계 최강 스페인의 가장 큰 무기다. 마드리드에 사는 파울 바예호씨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스페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스페인에서 축구는 종교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지난 2010년 스페인이 사상 첫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을 때는 5일 내내 전국적인 축제가 벌어지기도 했다. 경제위기에 시달리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축구는 삶의 고뇌를 덜어주는 여가이자 안식이 되고 있다.

◇스페인 축구의 뿌리, 유소년 시스템=많은 전문가는 스페인 축구가 정상에 선 비결로 우수한 유소년 교육 시스템을 꼽는다. 스페인은 자국에서 개최한 1982년 월드컵에서 조기 탈락한 후 절치부심, 장기적으로 유소년 교육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 결과 현재 프리메라리가의 각 팀에는 구단 유소년 팀에서 성장한 선수들이 5-20명까지 포함돼 주축을 이루고 있다. 대표팀의 성공도 이 정책을 도입하고 30년 정도 지나며 얻은 결실이라는 평가다.

라 코루냐 지역 주말리그에서 스페인 유소년 시스템의 수준을 엿볼 수 있었다. 5면의 인조잔디 구장에서 5-7세부터 16-18세까지 여섯 단계로 나뉜 선수들의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온 가족들도 눈에 띄었다. 경기가 끝나면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나들이하는 것이 주말의 일상이라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리그의 규모다. 이 지역에 사는 카를로스 하비에르씨는 “라 코루냐 시에만 나이별 단계마다 20개 이상의 팀이 운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전국적으로는 축구협회에 등록된 유소년 선수가 46만 7천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선수로 자라는 것은 아니다. 하비에르씨는 “주말리그를 뛰며 재능을 발견하는 아이들만 선수의 길로 들어선다”며 “다른 아이들은 규칙적으로 운동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 것이다. 유소년뿐 아니라 성인 사회인 리그도 지역마다 운영되며 축구협회가 직접 관리하고 있다.

유소년 시스템의 성공은 여러 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무엇보다 국가대표팀 성적에 밑거름이 됐다. 잉글랜드 역시 최고 수준의 리그를 갖고 있지만 각 팀에서 자국 선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스페인에 비해 적다. 이는 잉글랜드 대표팀이 스페인만큼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하는 이유로 지적된다.

각 구단에도 유소년 시스템은 중요한 자산이다. 선수들이 어릴 때부터 같은 전술 하에 호흡을 맞춰 성인 팀의 조직력도 높아진다는 분석이다. FC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에서 함께 성장한 사비, 이니에스타, 메시가 대표적인 예다. 스페인축구협회 유소년국장 히네스 멜렌데스씨는 대한축구협회가 개최한 세미나에서 “스페인은 19개 지역마다 나이별 대표팀을 운영하며 선수들이 성장하는 동안 일관된 방식으로 교육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소년 시스템은 리그 흥행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각 팀에 지역 출신 선수들이 다수 포함되면서 ‘우리 지역의 팀’이라는 연고 의식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팬들은 매주 주말리그에서 보던 아이들이 성장해 뛰는 모습을 보며 팀을 더 각별히 여기게 된다.

▲ 어려도 진지하게 라 코루냐 지역 주말리그에 참가한 데포르티보 알레빈(10-11세) 팀 선수들. 유소년 주말리그는 프로축구와 같을 일정에 따라 1주일에 한 경기씩 1년간 이어진다.

◇경제 위기가 드리운 그늘=스페인 축구에도 위기는 있다. 경제위기의 여파가 축구 구단에도 닥친 것이다. 바르셀로나 대학의 호세 마리아 가이 교수(회계학)는 “프리메라리가 20개 구단이 총 35억 유로의 빚을 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는 구단이 늘자 정부와 프로축구연맹이 세금 납부기한을 연장하는 등 구제에 나섰지만,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유로존의 재정 지원을 받는 스페인 정부가 축구 구단에 세금 혜택을 주는 것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을 떠나 외국으로 이적하는 선수도 늘고 있다. 선수 유출은 리그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AFP에 따르면 유럽 내 31개 외국 리그에서 뛰는 스페인 선수가 2011년 114명에서 2012년 148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지난 2011년에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선수협의회가 임금 체납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레알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와 다른 구단 사이의 재정 격차도 리그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문제로 꼽힌다. 회계법인 딜로이트에 따르면 두 팀은 2008년부터 4년간 유럽 전체에서 1,2번째로 많은 이익을 거뒀다. 그러나 나머지 팀은 이 기간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발렌시아만이 20위 안에 한 번씩 드는 데 그쳤다. 재정 격차는 성적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2004년 발렌시아가 우승한 이후 지난 9년간 리그 우승은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만의 것이었다.

스페인 프로축구연맹은 재정 격차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TV 중계권 계약 방식 개선에 나서고 있다. 잉글랜드, 프랑스 등과 달리 스페인은 각 구단이 개별적으로 방송사와 중계권 계약을 맺고 있다. 그 결과 6억 유로에 달하는 막대한 중계료의 절반 정도가 두 구단에 집중되는 현상이 수년째 이어지고 있다. 각 구단과 축구연맹은 지난 2010년부터 단체계약 방식 도입을 두고 논의를 벌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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