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부조리에 대한 반항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일련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보인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여자친구와 극장과 해변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반사되는 햇빛에 불쾌감을 느낀 그는 어느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인다. 사법체계의 관점에서 당연히 뫼르소는 중죄인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그 어느 것도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저 처형을 기다린다.

뫼르소의 운명과 시간을 규정하는 사회적 질서는 그의 행동의 계기와는 상관없이 기계처럼 작동한다. ‘눈이 부셔서 살인했다’라는 진술을 묵살한 법정에서 그는 이 세계가 낯설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배우가 무대의 붕괴를 목격하는 것처럼. 예술적 형상화 과정에서 과장된 측면은 있으나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의도한 것은 뫼르소가 곧 ‘우리’라는 사실이다. 뫼르소는 삶의 ‘부조리함’을 표상하기 위해 동원된 장치이자 인간의 은유인 것이다. 이 부조리함의 정체는 카뮈의 또 다른 저서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설명된다.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시지프스의 신화』는 이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자살해야 하는가’라는 이 질문은 ‘살 가치는 있는가’로 치환될 수 있다. 카뮈가 말하길 이런 질문을 촉발하는 궁극적 원인은 바로 ‘부조리’다. 뫼르소가 법정에서 느낀 감정인 부조리는 인간이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데서 기인하는 일종의 분리의식이다. 부조리는 세계에 익숙하게 부여해온 의미 체계가 돌연 낯설어지는 경험, 세계로부터 단절되는 경험이다. 인간에 대해 원초적 적대를 지닌 세계를 인위적이고 얕은 의미의 망으로 둘러싸려 했을 때의 결과인 것이다. 이는 곧 시지프스가 끊임없이 돌을 굴려야 하는 조건이며 법정에 의해 선고받는 뫼르소의 상황이다. 이렇듯 부조리는 인간과 세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충돌이 개인적 차원의 고독으로 승화한 감정이다.

‘기상, 전차, 사무실이나 공장에서의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일, 식사, 잠,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일주일’은 우리가 일상으로 규정지은 일련의 스케줄이다. 타성에 젖고 권태로운 이 ‘일상’에 대해 별안간 ‘왜’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카뮈는 누구나 한 번쯤 제기했음직한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여 나가는데 그 결과 ‘자살’ 혹은 ‘반항’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여과된다.

‘자살’은 곧 도피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은 자신의 목숨을 물리적으로 끝내는 것과 철학적으로 자살하는 것이 있다. 전자는 부조리를 감지하게 하는 의식을 버리게 함으로써 나름대로 부조리를 해결한다. 그러나 자살이 미완의 선택지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죽음 이후의 상황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카뮈는 또 다른 부조리한 세계가 죽음 이후에 도사리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철학적 자살은 구체적인 삶과는 상관없는 어떤 절대적 존재를 상정한 뒤 그것을 믿는 것이다.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에 매몰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는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해석을 끌어들임으로써 부조리를 의식하려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두 번째 선택지인 반항은 ‘자신을 짓누르는 운명을 문제삼고’ 이를 순간순간마다 문제삼는 것이다. 그런데 자살이 해결해주지 못한 이 세계의 부조리함이라는 문제를 반항은 해결해줄 수 있는가? 앞에서 부조리의 원인이 ‘인간에 대한 세계의 원시적 적대’에 있다고 한 바, 이 질문은 답은 비관적이게도 '아니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뮈는 인간은 삶의 부조리한 근본 조건에 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삶의 비합리성을 그대로 껴안고 여기에 질문하는 것만이 삶을 인간에게로 돌려준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를 위시한 프랑스 좌파 지성계에 그를 자리매김 해준 이런 철학적 시도는 『반항하는 인간』이란 저서로 구체화된다. 그러나 이 저서는 역설적이게도 카뮈를 좌파 지성계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폭력을 ‘예외’로 규정하다

『반항하는 인간』이 출간된 1951년은 카뮈가 『시지프스의 신화』를 저술했을 때와 상황이 많이 변화한 시기였다. 먼저 명백하게 대항해야 할 대상인 나치가 패퇴한 후였으며 대신 세계는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돼 있었다. 자본주의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경험한 당대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감에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이런 경향은 당대 프랑스 좌파 지성을 대표하던 사르트르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와 같이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적극적으로 연계시키는 선언적 저작들을 발표했다. 물론 이 당시에도 카뮈와 사르트르는 사상적 입장을 같이하지 않았음에도, 카뮈는 사르트르의 『구토』에, 사르트르는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평론을 써주는 등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들 사이의 사상적 견해차는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이 출간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모두가 ‘새로운’ 사회를 지지할 때 카뮈는 홀로 소련의 전체주의의 폭력성에 주목했다. 부조리가 야기하는 고독을 연대로써 극복하기 위한 공산주의 혁명의 시도는 정당하나, 이것이 폭력에 의존하는 ‘이탈한 반항’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카뮈는 마르크스주의의 ‘빛나는 미래’가 혁명에 수반되는 모든 폭력을 정당화한다고 신랄히 비판한다. 카뮈에게 있어 참된 반항은 어디까지나 폭력을 예외로 규정하고 인간을 그 근거로 삼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에 수반되는 폭력의 한계와 절도(節度)에 대해 말하는 이 책을 쓰고 나서 카뮈는 지금껏 자신을 지지해온 사르트르와 좌파 지성계의 긍정적인 반응을 기다린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창간한 사상지인 「현대」의 기자들은 맑시즘의 교조주의를 경계하며 ‘혁명에 찬 물을 끼얹는’ 이 작품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서평기사를 내놓는다. 우파 언론이 이 작품을 악용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카뮈와 친분을 유지하던 사르트르가 아닌 스물아홉 살의 좌익 활동가인 프랑시스 장송에 의해 작성됐다. 기사에서 장송은 “이 세계에서 이뤄지는 모든 기획을 거부함으로써 이 세계 운동을 단절시키려 한다”며 카뮈의 야심작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운동, 카뮈가 말하는 반항 활동을 위해선 일단 그 운동에 개입해야 하는데 카뮈는 그 운동의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좌파 지성계가 역사주의와 폭력의 정당성을 재고하길 바랐던 카뮈는 장송의 글에 충격을 받고 몹시 우울해한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카뮈는 사르트르에게 반박문을 보내게 되는데 이 편지는 “당신의 기사”, “당신의 공저자”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등 장송이 쓴 기사의 작성자가 사르트르인 것처럼 서술되고 있다. 직접 그 기사를 쓰지 않은 사르트르로서는 자신을 지목해 쓰인 그 반박문이 부적절해 보였고, 이는 사르트르가 카뮈에 대한 비판에 동참하게 된 계기가 됐다.

‘역사의 진보를 위한 거라면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 앞에 서로 다른 답을 내놓은 두 사람인만큼 사르트르는 그가 “스탈린주의자의 공모자를 자처한다”고 말하는 카뮈에 대해 신랄하게 반박한다. 사르트르는 먼저「현대」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보이는 전체주의적 징후를 묵인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소련의 강제수용소 등 비인간적 상황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사회주의 혁명을 역행시키는 데 이용당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런 해명의 연장선상에서 사르트르는 역사에 대한 카뮈의 태도를 문제삼기도 했다. 그가 보기에 카뮈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역사를 바라보며 손가락 하나를 담갔다가 재빨리 빼내는 데 열중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카뮈가 사르트르의 반박문에 응하지 않은 채 논쟁이 마무리됐다는 점에서, 당대 사람들은 카뮈의 패배로 결론짓는다. 역사와 폭력 그리고 정당성을 둘러싼 이 사상사적 논쟁은 카뮈와 사르트르 간의 결별로 이어졌고, 카뮈는 파리의 지식인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카뮈는 자칫 폭력이 수단화되기 쉬운 혁명적 상황을 경계하는 유의미한 작업을 진행했으나, 당시의 정세 상 그의 정치적 견해는 인정받기 쉽지 않았다. 다만 이 논쟁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적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여전히 남긴다. 프랑스 인문학연구모임 ‘시지프’의 변광배 대표는 “현재도 아프리카의 재스민 혁명과 같이 폭력 문제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상황”이라며 “폭력이 역사의 발전 가운데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지 묻는 건 지금도 유의미한 것”이라 말한다.

영원한 반항인, 카뮈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 (중략) …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 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뮈가 레지스탕스 활동의 기억을 재료삼아 1947년 출간한 소설 『페스트』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는 파시즘의 충격에서 갓 벗어난, 지식인들의 좌우익 대립이 격화되지 않은 시기에 이 소설을 썼다. 카뮈는 파시즘이 패퇴한 직후에도 인간의 자유와 정의가 언제든 억압될 수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예감은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소위 ‘자유민주주의’가 득세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물론 문제를 인식하되 문제의 가장 효율적인 해결 대신 계속된 멈춰 섬과 끊임없는 자각을 요구하는 카뮈의 해법이 사르트르와의 논쟁에서 드러났듯 부적절해 보일 수도 있다. 유호식 교수(불문과)는 “카뮈가 폭력을 거부했다고 해서 그가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다”며 “알제리 독립문제와 같은 경우 식민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한 구조적 문제를 간과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중앙집권주의 를 거부하는 그의 급진적이고도 까다로운 발언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가 역사의 중심에 인간을 세우려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기언 교수(연세대 불문과)는 “카뮈는 골수 휴머니스트”라며 “20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만한 휴머니스트가 없다”고 평가한다. 부조리를 의식하고 반항이 시작된다 하더라도 구체적이고 살아 숨쉬는 인간 대신 추상적인 절대성이 자리잡는 양상을 역사는 계속해서 보여주었다.

더불어 카뮈는 세계에 부여된 의미 체계는 절대적일 수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인간의 유한한 존재와 활동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순간 인간과 세계 간의 간극은 더 커지게 된다. 그러나 종교의 시대, 혁명의 시대가 지나간 21세기에 새로운 믿음의 체계가 들어섰다. 그것은 ‘잘 먹고 잘 살기’라는 실로 건전한 구호로 위장되기 쉬운 자본의 구조다. 출근과 식사, 퇴근과 여가 생활로 이뤄진 하루의 일과 속에서 우리는 뭔가를 의심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포장된 다른 누군가의 의지가 우리의 생활을 조직한다는 부조리한 느낌이다. 모든 권력에 대한 반항을 주창한 카뮈는 이 비가시적인 ‘매끈한 폭력’ 또한 폭력임을, 인식해야 하는 대상임을 확신할 것이다. 변광배 대표는 “권력을 보호하는 장치가 교묘해졌으며 미국 같은 선진국에도 폭력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며 카뮈의 현재성을 평가한다.

또 좀 더 직접적 차원의 폭력인 전쟁의 문제도 남아있다. 어떤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폭력의 정당한 근거로 위장되는 상황은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기에 비해 규모만 작아졌을 뿐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특정 이해집단의 권력 쟁취가 됐든, 종교적 원리의 실현이 됐든 누군가의 목적을 위해 사린가스를 살포하는 야만적인 실태는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군수 기술의 계속된 발전은 “실제로 단 한 사람의 주인이라도 살해되는 일이 생긴다면 어느 의미에서 반항하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 공동체를 말할 자격이 없게 된다”는 카뮈의 선언을 무색케 만든다.

카뮈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피가 흐르지 않는 이데올로기 대신 유호식 교수가 말하듯 “다시 소외된 자들에 대한 연민과 연대의식을 요청”한다. 결국 인간이라는 것. 이 소박하나 실현하기 어려운 명제를 공리로 만드는 것이 남은 ‘반항적 인류’의 숙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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