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최지수 기자 orgol222@snu.kr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이 국내에서도 꽤 인기를 모으는 중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만화 속에서 우익적인 혐의를 발견해내고 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생겨나고 있다. 이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우선 「진격의 거인」이 전제하는 세계관이 자존감을 다시 찾기 위해서라도 다시 나가서 싸워야 한다는 일본 극우파의 주장과 겹친다는 데 있다. 헌법 개정을 통해 당당히 군대를 보유하고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가, 무기력과 패배주의에 빠진 동료들에게 거인에 맞서 싸우기를 주장하는 「진격의 거인」 속 주인공의 태도를 통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최근 작가가 블로그에 존경한다고 밝힌 인물이 러일전쟁의 영웅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라는 것이 드러난 이후 심증은 굳어졌다. 극 중 인물 이름인 ‘미카사’가 러일전쟁에서 활약한 함대의 이름이라는 지적도 한몫했다.

하지만 이렇게 결론을 내리기에는 문제가 간단치 않다. 우선 아직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거인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주인공의 주장 자체가 미봉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서사가 진행될수록 인류를 잡아먹는 것으로 설정된 무시무시한존재로서의 거인만이 인류의 ‘적(敵)’이 아니라, 오히려 적이 누구인지 확실치 않은 상황 자체가 문제시 되고 있다. 기득권층 일부만 세계의 진실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대다수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적을 ‘거인’이라고 단정 지은 채 비합리적인 체제에 순응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주인공의 존재론적 기반을 흔드는 결정적 질문이 제기되기에 이르는데, 그것은 바로 “적이 뭐라고 생각하는가”이다.

이것은 왜 결정적 질문인가? ‘적’의 실체가 사실은 불명확하다는 것이 이 질문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진정한 적은, 적이란 오직 ‘거인’뿐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명목으로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인을 죽이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실업자들을 무방비 상태로 성 밖으로 내보내는 지배층, 아니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조작해내는 종교 집단이 주인공의 적일수도 있다. 심지어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조차 냉소하거나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는 일반인들도 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일본의 상황에 적용했을 때, 국민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고 전쟁을 외치는 극우주의자나,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고 신사참배를 강행하는 등 ‘역사인식의 착오’를 보여주는 정치인들, 그리고 이를 방관하는 국민이야말로 일본 내부에서 맞서싸워야 할 적인 것이다.

그런데 ‘역사인식의 착오’ 속에서 “21세기의 문제를 20세기 방식으로 풀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일본에 국한된 이야기일까? ‘내란음모죄’라는 진부한 상상력으로, 자기 조직의 존립을 위해 ‘국익’이라는 이름을 너무도 손쉽게 이용하는 양 진영 간의 진흙탕 싸움 속에서,국민들의 ‘삶’의 문제들은 뒷전으로 내팽개쳐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진격의 거인」의 주인공이 그러했듯, 불가능한 과제에 도전하는 것인지 모른다. 손쉽게 판단을 중지시켜 버리는, 내란음모죄냐 아니냐하는 이분법에 맞서, 어떻게 그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것인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진격에 맞서 반격을 할 때, 벽인 줄 알았던 것이 문이 될 수 있다.

안지영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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