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 앞선 걸음을 걷다
강세황, 앞선 걸음을 걷다
  • 강혜정 기자
  • 승인 2013.09.01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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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① 영통동구도

혹시 「영통동구도(靈通洞口圖)」(그림 1)라는 그림을 미술교과서에서 본 기억이 있는가? 이름만 들어서는 긴가민가하던 사람도 커다란 바위에 푸른 이끼가 끼어있는, 일반 산수화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그림을 보면 “아, 이거였구나”하고 기억해낼지도 모른다. 대담하게 처리한 바위와 산, 그리고 청, 녹, 갈, 황색의 담채로 명랑하고 신선한 감각을 주는 이 그림은 올해 탄생 300주년을 맞은 표암 강세황의 작품이다. 이를 기념해 지난달 25일(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시대를 앞서간 예술혼'이라는 주제로 강세황의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는 어떤 측면에서 시대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는 것일까.
 
◇선구자적 면모를 보인 강세황=강세황이 살았던 18세기는 문화의 황금기였다.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형식화된 창작에서 벗어나 직접 산수를 보고 그리는 진경산수화나 풍속화가 성행했으며, 서민들 사이에서는 민화가 활발히 그려졌다.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이 시대에 강세황 역시 여러 가지 실험적인 회화를 시도했다. 그는 당시 잘 그리지 않던 해당화나 봉숭아를 그리는 등 다양한 소재에 관심을 보였으며 난에 채색을 하는 등 남이 시도하지 않은 방법도 과감하게 구사했다.
 
한 그는 중국 사행 길에서의 경험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당시 문인이 자신의 사행 경험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 민길홍 학예연구사는 “이는 강세황이 새로운 문물과 경험에 목말라하고 그 경험을 자신의 삶 속에서 소화하고 있는 진취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강조한다. 김홍도를 평가한 글에서도 그의 선구자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신분상 중인이었던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는 당시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강세황은 “참으로 역대에 보기 드문 걸작”이라며 김홍도의 풍속화에 대해서 높이 평가할 줄 아는 깨어있는 인물이었다.
 
강세황의 선구자적인 면모는 자화상을 그린 데에서도 드러난다. 자화상은 스스로 그린 자기 초상화로 자아 성찰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자신에 대한 주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르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화상이 활발히 그려진 서양과 달리 조선시대엔 전문 화가를 초청해서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시대에 자화상을 그린 인물은 강세황, 윤두서 정도였다. 그렇다면 강세황은 왜 굳이 자화상을 그렸던 것일까?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다=18세기 조선시대엔 초상화가 다량으로 제작됐다. 이런 흐름 속에서 소수의 지식인만이 자화상을 제작했다.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회화기술이 필요한 동시에 자부심을 드러낼 만한 사회・경제적 지위가 뒷받침 돼야 했다. 이 요건을 동시에 갖추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자화상은 그리 많이 제작되지 않았다. 회화에 능숙한 화원들은 사회・경제적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았고 문인들은 회화기술을 경시했기 때문이다. 영조가 강세황에게 “인심이 좋지 않아서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길 사람이 있을 터이니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한 일화는 당시 풍조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중에 자화상을 다수 그린 인물이 바로 강세황이다. 강세황은 54세에 만든 자서전인 『표옹자지(豹翁自誌)』에서 스스로의 외모에 대해 “키가 작고 외모가 보잘 것이 없어”라고 말하면서도 “그 속에는 이러한 탁월한 지식과 깊은 견해가 있으리라”고 말하며 본인의 학식을 자신했다. 현재 강세황의 초상화 8점 중 자화상이 4점이나 된다. 서울대 박물관 진준현 학예연구사는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직접 그리겠다는 내적인 동기가 필요하다”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 표현하겠다는 자체만으로도 근대적인 사고를 엿볼 수 있다”고 했다.
 
▲ 그림 ② 자화상 유지초본

61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관직생활을 시작한 강세황의 자화상은 크게 출사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자화상은 『정춘루첩(靜春樓帖)』의 「자화상 유지초본」(그림 2)이다. ‘유지’는 말그대로 기름종이이며 ‘초본’은 밑그림을 뜻한다. 한성대학교 강관식 교수는 이에 대해 “끝이 닳은 뭉툭한 붓을 사용해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그대로 담아 감정과 표정을 강하게 드러낸 표현적 초상화”라고 평가했다. 강세황 자화상 유지초본의 선은 가늘고 거친 느낌이지만 어떠한 꾸밈도 없이 섬세하게 얼굴을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방법은 강세황 50세 무렵의 경제적 궁핍함과 심적 절박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렘브란트나 고흐 자화상의 거친 붓질이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개성으로 평가받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편 출사 이전 그림 속 강세황은 세로로 긴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이 모자는 탕건으로 통상적인 탕건과는 다른 모양이다. 이 그림은 출사하기 이전에 그려졌기 때문에 관사만이 착용할 수 있는 탕건을 변형된 모양으로 그린 것이다. 두 번째로 그린 『임희수전신첩(任希壽傳神帖)』속 탕건 또한 온전한 모양이 아니다.
 
출사 이후의 자화상은 이전과는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종이 위에 그림을 별도로 오려서 붙인 「자화소조(自畵小照)」는 출사 직후에 그린 자화상이다. 유지초본과는 달리 탕건이 매우 자세하게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탕건이 관료여야 착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관직진출은 강세황에게 큰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지초본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화려해진 색감과 부드러운 붓질도 관직생활 이후 여유로워진 강세황의 심적 상태를 반영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그려진 「70세 상」(그림 3)은 가장 잘 알려진 자화상이다. 그림 속에서 강세황이 쓰고 있는 오사모는 관복을 입었을 때 쓰는 관모인데 특이하게도 그는 오사모에 외출복인 도포를 입고 있다. 이는 몸은 조정에 있지만 마음은 자연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강세황은 이런 뜻을 자화상에 담아 자신을 우의적(寓意的)으로 표현함으로써 사의적(寫意的) 성격을 갖는 문인화 차원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다.
 
◇서양화법을 수용하다=진준현 학예연구사는 “강세황은 조선시대 문화 융성기였던 18세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강세황이 이러한 평가를 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서양화법에 자신만의 개성을 녹여내 그만의 화풍으로 소화했기 때문이다. 서양화법은 명암법, 원근법, 다양한 색채의 사용을 특징으로 한다. 선교사들을 통해 중국을 거쳐 조선에 전래된 서양화법은 조선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에 따라 서양화법을 적용한 작품이 제작됐지만 대부분 선에 색을 살짝 칠하는 정도에 그쳤다.
 
서양화법을 산수화에 사용한 것은 강세황이 처음이며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이 대표적인 예다. 그는 『송도기행첩』의 「영통동구도」에서 산수의 현장감을 드러내기 위해 명암법을 사용했다. 『송도기행첩』에는 원근법을 사용한 「개성시가(開城市街)」와 같은 그림도 있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원근법은 일본의 목판화인 ‘우끼요에’에서 보이는 과장된 원근법과 비슷하다.
 
▲ 그림 ③ 70세 상

그의 77세 작품 「피금정도(披襟亭圖)」에서 가까운 산과 먼 산의 거리감이 느껴지도록 거리가 멀수록 흐리게 표현해 원근법의 효과를 살렸다. 북경에서 천주교회를 방문해 서양화를 직접 본 뒤 그린 「피금정도」에서는 「개성시가」의 서양화법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강세황은 「피금정도」에서 서양화법의 원리를 적용한 동시에 수묵을 위주로 사의적인 면을 중시하는 남종화의 분위기를 더해 그만의 개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세황이 다수 그렸던 자화상에도 역시 서양화법이 드러난다. 그는 자화상에서 명암법을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명암법은 이미 숙종대부터 널리 사용돼 왔던 것이지만 강세황은 기존 화원들의 부드러운 명암법과는 다른 표현법을 사용했다. 그가 그린 「자화상 유지초본」을 보면 까끌까끌한 붓으로 움푹 들어간 부분을 칠했고 뭉툭한 선을 여러 번 겹쳐 그려 거친 피부를 표현했다. 강세황은 붓질을 반복해 얼굴의 명암을 묘사하는 필묘법, 연한 먹이 마른 뒤 그 위에 짙은 먹으로 덧칠하는 적묵법을 소묘하듯 사용해 사실적이고 개성적인 화법을 구사하며 표현적인 초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강세황은 조선후기 르네상스 시대에 자화상을 제작, 서양화법을 앞서 도입하는 등 시대를 앞서가는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최근에 열린 전시회와 관련해 위작 논란이 제기되고 서양화법 도입과 관련해서도 논의의 여지가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는 등 앞으로 연구가 필요한 부분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강세황의 독창성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의 현 ‘자화상’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전통’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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