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급은 과연 사라졌는가?” 『노동계급은 없다』에서 부두노동자였던 저자 레그 테리오는 일견 도발적으로 보이는 이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제목의 도발적인 태도와는 다르게 책의 대부분은 노동 현장에서의 소회와 성공적으로 운영됐던 노조에서의 경험으로 채워져있다. 20세기 중반 미국 노동계가 황금기를 구가한 시절과 쇠락하는 과정이 담담하게 묘사된 이 책에서 우리는 노동자 계급이 역사로부터 말소됐다는 체념 대신 복구해야 할 과거의 청사진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노동자는 ‘부품’이 아닌 ‘인간’으로서 노동할 수 있으며 나아가 소외된 타자에게까지 시선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 삽화: 강동석 기자 tbag@snu.kr

오늘날 노동자의 위상과 연대 가능성은 저자가 노동자로서 일하던 시기에 비해 축소됐다. 그 원인은 ‘노동’을 철저히 기업에 종속시킨 현대의 경영 전략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업은 효율성을 명목으로 노동자의 업무 시간, 업무 수행 방법 등을 하나하나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상정했다. 이렇듯 노동자를 대상화시키는 경향은 결국 노동자로부터 자율성을 앗아가고 그들의 노동할 권리를 빼앗았다. 그러나 글쓴이는 이런 ‘사측의 규정’이 “노동자가 원래 하던 일들을 부분적으로 명문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 업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노동자이며 심지어 계산기를 두드리는 노조 간부 업무 또한 현장에 투입돼봐야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글쓴이는 부두에서의 노동이 기계화의 흐름 속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1970년대 초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 일화는 노동자가 현장 경험과 자발적인 상호 협력을 바탕으로 인간적인 조건에서 일하는 것이 오히려 더 높은 효율성을 이끌어낼 수 있음을 말해준다. 1970년대 초 사측은 ‘기계화와 현대화’라는 명목으로 노동자의 수를 대폭 감축시킨다. 기업의 대량 해고 이후 남은 절반의 부두노동자가 두 사람의 몫을 해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화물 작업 노동자들은 작업 능률성 향상을 위해 스스로 해결책을 만들어낸다. 이는 무척 간단하게도 화물창에서 짐을 적재하는 지게차를 운전할 사람과 쉴 사람을 동전을 던져 결정하는 것이었다. ‘모든 노동자가 일을 하면 효율이 늘어날 것이다’라는 사측의 판단과는 달리 과중한 노동 강도는 업무를 저해했던 것이다. 휴식 시간을 노동자 자율적으로 결정한 결과 효율은 올라갔지만 회사측 입장에서 이는 ‘근본적으로 작업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었고 또한 할 일 없이 ‘앉아서 노는 것’이었다. 여기서 노동 현장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자는 관리자가 아니라 육체노동자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렇듯 글쓴이의 기억은 노동자는 관리자의 감시 없이도 자발적으로 생산의 주체로 나설 수 있다고 증언한다.

더불어 그 당시의 노동자는 ‘생산의 주체’인 동시에 ‘정치의 주체’이기도 했다. 저자는 노동자가 회사라는 울타리를 넘어 정치적 국면으로 활동을 확장시킬 수 있는 존재임을 증언한다. 그가 노조에서 활동했던 당시는 노조가 자신의 이해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적 조건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런 성찰의 결과를 민주적인 방식으로 공식화하기도 했다. 저자는 자신이 몸담았던 샌프란시스코의 ‘국제항만창고노동조합’에서 이를 증명할 몇 가지 중요한 경험을 한다. 이를테면 전체 노조 회의 시작 전 ‘국기에 대한 경례’를 생략할 것인지의 여부를 앞두고 벌어진 토론이 있다. 미국의 냉전 정책에 대한 대응을 주제로 한 이 토론은 육체노동 종사자들도 정치적 의식을 가질 수 있음을, 또 이를 공통의 ‘계급적 목소리’로 정제해내는 합리적인 조직을 결성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 회의에서 이런 가능성을 발견하고 충격을 느낀다. 여기서 ‘국기에 대한 경례’의 표결은 중요한 사안인 만큼 노조 간부를 새로 뽑는 내년 가을로 연기되야 한다는 수정안이 나오고 회의를 진행하던 지부장은 이에 찬성한다. 그러나 ‘브라운’이라는 일반 노조원은 이런 수정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세 번의 독회를 거쳐야 한다고 노조 회칙에 명시돼 있음을 밝히며 지부장 활동의 적법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지부장은 여기에 응해 절차에 따라 3분간 변론한다. 이런 절차는 당시의 육체노동자들이 적법성과 합리성을 고려한 평등한 정치적 조직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활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노조’라는 공간 안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선동의 형식으로 강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의 목소리를 합리적으로 정제해 드러낸 것이다.

이렇듯 자본주의의 성지인 미국에서 노동자 간의 강력한 연대의식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결국 노동계를 동질적이지 않은 개체들로 분화시켰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비정규직이 실업자를 외면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렇듯 세계화와 과열된 경쟁은 사측이 노조를 더욱 압박하도록, 노동자가 언제나 생존의 불안에 떨게끔 만들었다. ‘자기 보존’에 대한 이 공포는 이전에 존재했던 ‘계급의식’이라는 동질성을 삭제하고 연대를 불가능한 것으로 상정하게끔 몰아가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노동계급은 없다』는 이런 시대 변화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이전의 노동계에 대한 회고는 현재를 돌파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주진 않지만 대신 하나의 문제의식을 던져준다. 과거에 노동자들이 생산 과정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사실, 이들의 정치적 집합인 노조가 자신들의 이해관계 바깥의 문제까지 해결하려 했다는 사실은 ‘지금 그리고 여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다시, 노동계급은 사라졌는가. 사라졌다 한들 그것을 복구해야 할 필요성 또한 사라진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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