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 가면 볼 수 있는 베스트셀러 코너. ‘베스트셀러’ 명단이 일종의 보증수표로 작용해 사람들의 손은 베스트셀러로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명단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 출판사의 ‘고질병’으로 불리는 책 ‘사재기’가 최근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사재기는 출판사들이 자사가 출간한 책들을 서점에서 다시 구입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도록 ‘조작’하는 것이다. 지난 8월, 출판사 ‘자음과 모음’이 사재기 의혹을 보도한 방송사를 상대로 반론보도를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자신들은 사재기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직 진행 중에 있는 사안인 만큼 그 진위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출판계에선 이번 사건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재기’논란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5월 SBS의 TV시사프로그램 ‘현장 21’에서 출판사 자음과 모음이 사재기를 했다는 내용의 방송을 내보냈다. SBS 취재진이 4대 주요 온라인서점의 구매 기록 10만 여건을 확보해 분석한 결과, 자음과 모음의 몇몇 책이 개인 앞으로 수 십, 수 백 권씩 팔린 내역이 발견됐다. 책을 대량 반복 구매한 사람들을 찾아가니 주소가 존재하지 않거나 구매자가 자신이 거래한 내역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취재진은 한 대량 반복 구매자의 말을 통해 출판사의 개입이 있음을 알아냈다. 구매자는 “따로 책을 주문하는 게 아니라 보내주는 사람이 따로 있다”며 “출판사에 다니는 친구가 새로 나온 책을 임의로 보내준다”고 했다.
 
▲ 삽화: 이예슬 기자 yiyeseul@snu.kr
자음과 모음의 책 중 사재기 의혹을 받은 작품은 황석영 작가의 『여울물 소리』, 김연수 작가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백영옥 작가의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모임』 등이다. 사재기 의혹이 제기된 이후 황 작가는 방송을 통해 “나의 인생 전체를 모독하는 치욕스러운 일”이라며 자음과 모음에 책의 절판을 요구하고 명예훼손 혐의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낼 계획이라 밝혔다. 그는 기자회견을 열어 검찰의 수사와 대형서점들의 베스트셀러 도서 자료 제공, 그리고 국회의 법 개정을 요구했다. 이에 강병철 자음과 모음 대표는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겠다”며 사퇴를 했고, 자음과 모음 출판사 내에선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새 경영인을 선출했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 8월 22일 황광수 자음과 모음 신임 대표는 지난 3개월간 진행했던 비상대책위원회의 진상조사에서 사재기를 한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현장 21’의 사재기 의혹 보도에 대해 언론중재위원회에 반론보도 중재신청을 냄과 동시에 SBS를 상대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현 사건이 원활하게 해결되지 못하는 것은 이 문제를 책임지고 수사할 주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재기 의혹을 받았던 황석영 작가는 기자회견을 통해 “국회는 베스트셀러 조작을 위한 사재기 행태를 주가 조작 못잖은 범죄로 인식하고 법 개정에 나서달라”고 검찰에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이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전속 고발권을 갖고 있어 수사는 어렵다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공정위의 전속 고발권이 폐지된 현재에도 검찰은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불공정 거래를 담당하고 있는 공정위 측도 미동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전에 공정위는 검찰 측에서 관련사항에 대해 통보하거나 당사자의 신고가 들어온다면 이를 법리적으로 검토, 확인할 것이라는 입장만 밝혔을 뿐이다.
 
검찰과 공정위가 서로 책임을 미루는 것은 이런 범법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이 명시돼있지 않기 때문이다. 공정위에서는 사재기를 공정거래법상 불공정 행위로 보고 규제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입장이다. 베스트셀러에 인위적으로 오르게 해 고객을 유인했다는 점에서 현행법상 사재기는 ‘거짓계략에 의한 고객유인’에 해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정위는 출판사가 아닌 대형서점이 독립적으로 베스트셀러를 선정하기 때문에 이 규정을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사재기 의혹이 반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재기가 사실로 판명나도 처벌 규정은 ‘사재기가 적발된 경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또는 시·도지사가 천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는 출판문화산업진흥법이 전부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과태료 부과도 현재로선 내부고발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베스트셀러를 측정·관리하는 대형서점들 또한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현재 온, 오프라인 대형서점의 독과점이 이뤄지고 있는 도서유통구조상 대부분의 신간은 대형서점을 거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형서점들이 판매자 정보 제공에 협조적일 경우 사재기를 적발할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진다. 하지만 교보문고와 예스24를 비롯한 대형서점들은 개인정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판매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한 대형서점 출판사 관계자는 “소비자의 알 권리를 위해서 필요한 정보는 모두 공개할 수 있다”며 “하지만 거래정보, 매출량, 수익 등은 회사의 내부적인 정보이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도 정비가 우선시돼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처벌의 강화만으론 부족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변정수 출판평론가는 “‘재수없는 사람만 걸린다’는 인식이 출판계 안에서도 팽배하다는 지금, 이를 근절하기 위해 처벌을 강화하는 것은 또다른 악순환을 부를 수 있다”며 제도의 강화만으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강조했다. 그는 “어떤 행위가 ‘불법’으로 규정된다면, 그 법망을 교묘하게 피할 수 있는 더 엽기적인 변칙이 ‘새로운 마케팅 기법’으로 둔갑해서 출현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제도 정비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베스트셀러 목록의 집계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독자가 책을 선택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베스트셀러 집계는 각 서점마다 자체 기준에 의해 이뤄진다. 2010년 한국출판인회의는 ‘서점의 베스트셀러 집계·발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에 의하면 서점에서 개인이 구매한 경우 1인 1권, 조직에서 구매한 경우 구매량의 20%이내를 집계에 반영한다. 당시 교보문고, 영풍문고, 예스24, 알라딘 등이 해당 협약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가이드라인’은 강제성이 없어 이들이 가이드라인에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독일, 일본, 미국의 경우 대형 도매상 등이 전국 단위로 집계하는 종합 베스트셀러 목록이 영향력 있게 통용되고 있다.
 
변정수 평론가는 독자에게 책을 접할 수 있는 경로도 한정돼 있음을 지적하며 “대중이 책에 접촉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덧붙여 그는 대중이 책을 고를 때 ‘인기 있는’ 것에 주목하게 되는 배경으로 ‘책을 읽는 습관이 형성되는 시기인 청소년기에 입시에 집중하는 교육제도’를 지적했다.
 
오프라인서점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출판계는 이로 인한 출판시장 붕괴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팔리는 책과 팔리지 않는 책의 양극화도 심해지고 있다. 온라인서점의 베스트셀러 판매부수마저 떨어져 적은 부수로도 베스트셀러 진입하기가 쉬워진다. 이런 이유로 사재기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고 한다. 출판계는 유사 사재기를 막을 수 있는 도서정가제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카드사나 통신사가 할인 비용을 지불하는 도서 간접할인 방식을 제재하는 법적 근거가 없어 도서정가제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완전도서정가제’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출판계가 이번 일을 자정의 계기로 삼아 건강한 출판 생태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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