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강동석 기자 tbag@snu.kr

중국 당나라 시절, 남천산 보원사 스님들이 어느 날 풀을 베러 나섰다. 그런데 한적했던 산사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모두들 불쑥 나타난 새끼 고양이가 신기했던지 달려들어 잡고서는 귀여워했다. 그러나 이내 동, 서 양당으로 나뉘어있던 스님들이 서로 키우겠다며 다투기 시작했다. 이 절의 주지인 남천선사가 이를 보고 그 고양이의 목을 부여잡고는 풀 베던 낫을 들이대며 말했다. “왜 이 고양이를 두고 다투는지 말해보거라. 만일 이치에 맞게 얘기하면 고양이의 목숨을 구해줄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고양이를 베어버리겠다.” 이 말을 듣고 양당의 제자들은 우물쭈물할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남천선사는 새끼 고양이를 죽여 버렸다. 날이 저물자 출타 중이었던 수제자 조주가 돌아왔다. 남천선사는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조주는 즉석에서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머리 위에 얹고는 떠나갔다. 이에 남천선사가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오늘 네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고양이는 죽지 않았을 텐데.”

불교 선종에서 난해하기로 소문난 “남천참묘(南泉斬猫)”라는 공안(公案)의 내용이다. 이 화두를 접하니 생각이 꼬리를 문다. 해외 인턴을 모두 남성으로 뽑으면 성폭력 문제가 해결될 것이며, ‘해병대 캠프’ 명칭을 함부로 못 쓰게 하면 청소년의 건전한 성장이 이루어질 것인가. 세계무역센터를 파괴한들 제국주의 미국이 무너질 것이며, 빈 라덴을 살해한들 테러가 종식될 것인가. 일각에서는 뉴라이트의 역사 인식이 문제라며 그들의 견해가 담긴 교과서를 폐기하자고 하고, 이에 다른 일각에서는 ‘좌파와의 역사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어떤 모임에서는 한반도에 불어 닥칠 전쟁에 대비하자며 ‘농담’처럼 주요 거점 타격을 모의하며, 이에 대해 국가기구는 종북좌파세력이 문제라며 그들의 수장격인 한 국회의원을 제거하려고 한다. 무엇이 본령이고, 무엇이 말단인가? 교과서를 폐기하거나 ‘전쟁’을 선포하면 우리 역사가 바로 세워지는 걸까? 주요 시설을 점거하거나 한 조직의 우두머리를 잡아들인다거나 해서 우리 사회의 공동선이 확보되는 걸까?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에서 여러 사람의 입을 빌어 위의 공안을 해석한다. 이를 종합해보자면, 남천선사가 고양이를 벤 것은 자아의 미망을 끊어 망념과 망상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비정한 실천으로 고양이의 목을 자르면서 일체의 모순, 대립, 자타의 확집(確執)을 끊으려고 한 것이다. 한편 조주가 보기에, 고양이는 아름다움의 결정체였다. 그것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만,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고양이를 벤 것은 아름다움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행위였지만, 그것이 최후의 또는 최선의 해결책은 아니다. 고양이는 죽었지만, 고양이의 아름다움은 죽지 않았다. 이처럼 그 해결이 안이했던 것을 풍자해서 조주는 머리 위에 신발을 올려놓았던 것이다.

이 공안을 염두에 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설국열차』에서도 유사한 이미지가 두 번 제시된다. 자기 자리를 지키고 살라는 내용의 훈시를 하는 열차의 2인자가 꼬리칸 사람 머리 위에 신발을 얹는 장면, 그리고 꼬리칸 사람들의 폭동 이후 사로잡힌 2인자의 머리 위에 아까 그 사람이 신발을 올리는 장면. 조주 스님이 이 장면들을 본다면, 무어라 말씀하실까? 달리는 열차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본다.

장준영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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