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강동석 기자 tbag@snu.kr

영화 「감시자들」은 특별한 경찰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범인을 따라다니며 지켜볼 뿐이다. 그들에겐 임무를 제약하는 규칙들이 적용된다. 정보와 수사를 분리하는 규칙 때문에 범인을 놓치고 경찰관이 희생될 때는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그래서 마지막에 실장이 책임은 자기가 진다며 규칙을 무시할 때 쾌감이 느껴진다. 영화의 압도적 장면은 수백 대의 CCTV가 동시에 범인을 추적하는 씬이다. 아무리 범인이 도망쳐도 결코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영화는 현실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한다. 378만 개에 달하는 CCTV는 9초마다 당신을 촬영하고 있다. 어떤 곳을 가든, 소리까지 녹음하고 얼굴도 인식할 정도로 똑똑한 ‘감시자’가 지켜보고 있다.


1998년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더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휴대폰 감청, 인터넷 해킹, 인공위성 감시가 총출동하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NSA의 감청 행위를 합법화하려는 음모에 맞서 싸운다. 그리고 2013년, CIA 요원인 스노든은 NSA가 ‘프리즘’이라는 정보감시 프로그램을 이용해 인터넷을 감찰한다고 폭로했다. 구글, 페이스북 등 기업들의 서버에 접근해서 이메일, 동영상, 채팅 등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해온 것이다. 폭로는 곧 전세계적 논쟁으로 이어졌다. 스노든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지만 미국에서는 범죄자로 수배 중이란 사실은 양 극단의 시각을 상징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하루 30억 건에 달하는 감청이 테러와의 전쟁을 위한 것이라고 옹호했다. 국가 기관의 민간인 사찰과 정치개입이라는 스캔들을 겪었던 한국에서 감청 옹호는 더 극적으로 등장한다. ‘내란 음모’를 밝히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은 녹취록이었다. 국정원은 정당에 대한 3년 동안의 감청 사실을 공개하면서 정면 돌파를 선언한다. 국가기관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개인의 이메일과 통화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사회적 승인을 얻는 듯하다.

사람들이 감시기구의 확장을 수용하는 것은 범죄와 전쟁에 대한 공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통제받지 않는 권력이 통제받지 않는 감시와 결합된 한국에서, 불행히도 안전을 위한 ‘사소한’ 권리의 양보는 다만 권력에 대한 공포로 변할 뿐이다. 국정원장이 회의 자리에서 “정부·여당에 반대하는 사람은 종북”으로 “강에 처박아야지”라고 발언하는 현실에서, 적어도 국민의 절반은 당연스레 적으로 규정되어 감시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대국민 심리전’이 종북 좌파 척결을 위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어떤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지 끊임없이 파악하고, 뜻에 맞지 않은 이를 내치기 위해 사생활에서 흠결을 찾아내는 것. 자신만이 정보를 가졌다는 점을 악용해 정보를 유리한 방향으로 흘리고 나아가 조작하는 것. 이러한 모습들은 이미 현실에서 드러나고 있다.

문제는 권력에 대한 공포가 진화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감시자’임을 자처한다. 수업 내용을 고발하고 누군가의 트윗을 국정원에 신고한다. 영화는 상영이 중단되고 강연회는 취소된다. 자신이 권력과 맞서지 않는다는 것을 늘 보여주어야 하는 시대에, 국정원이 신고자에게 증정하는 ‘절대시계’는 말 그대로 국민의 자격이 된다. 하지만 시계를 찬 사람이 늘어날수록, 민주 공화국 대한민국은 더 위험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에게 눈 몇 개를 더 붙여주는 것이 아니라, 괴물에게 인간의 심장을 다는 것이다.

김경근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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