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현 교수
건축학과
 광장에 오벨리스크가 홀로 우뚝 서 있다. 그러나 오벨리스크가 있는 그 자리에 사람들은 설 수가 없다. 활기를 띠며 확장해 가는 것은 오벨리스크가 아니라 언제나 그 주변에 모이는 사람들이다. 투시도법도 마찬가지다. 모든 물체가 한 개의 소점에 모이게 되는 투시도법에서는 그 소점에 물체가 놓일 수 없다. 그럼에도 투시도법의 그림 안에 있는 모든 물체는 그 허구의 소점을 향해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런 투시도법의 소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광장 중심에 선 오벨리스크나 투시도의 소점은 다른 것을 완전히 배제함으로써만 특별해질 수 있는 묘한 것들이다.
 
대도시에도 도심이 있다. 그러나 대도시에서 도심이 언제나 중심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도심이 낙후하면 부도심이 생기고, 도시의 주변부가 발달하며 교외를 형성한다. 늘 번화하다고 여기던 도심이 쇠락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오늘날에는 예전에는 변방이고 변두리였는데 새롭게 활기를 띠는 장소가 되어 나타나는 예를 많이 본다. 도심이 아니라 주변의 경계가 장소로 변신하는 것이다.
 
나무의 심(芯)은 자라지 않는다. 나무가 자라는 것은 바깥에서 껍질이 싸고 있는 바로 안쪽이 자라기 때문이다. 나이테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심이란 한가운데 일단 형성되면 언제나 그 속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고 있는 녀석이다. 그런데도 바로 그 심이 나무 전체를 관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무는 그 속에 있는 심부터 썩는다. 심이 썩어 빈 곳이 나타나고 나면 다른 나무가 그 자리에서 꽃을 피우게 되어 있다.
 
중학교 때 집합을 배울 때, 어떤 집합의 부분 집합을 구할 때는 반드시 공집합을 넣으라고 배웠다. 공집합은 원소를 하나도 갖지 않은 빈 집합이다. 그래서 영어로 'empty set'라고 한다. 그런데도 무조건 부분 집합의 하나로 넣어야 한다고 배웠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어디에나 부분으로 속하는 공집합. 이것은 아무런 권한을 갖지 않은 것 같은데 중심을 차지하며, 일본 국민 전체 모두에게 관여하는 일본 ‘천황’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나는 이 괴상한 공집합의 정체가 늘 궁금했다.
 
나무의 중심인 듯이 보이지만 틀어박혀 변화를 모르는 나무의 심은 공집합과 같은 것이다. 중심에 있지만 자라기를 포기한 것, 잘 따지고 보면 무언가를 하나도 갖지 못한 것, 한가운데 있는 것만으로 모든 것에 관여하고 모든 것을 관장한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 그렇지만 가장 썩기 쉬운 것, 그리고 언젠가 주변에 의해 역전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 이것이 공집합과 같은 나무의 심이다.
 
숲에서는 아주 특별한 종류의 나무 몇 그루가 숲을 지배하지 않는다. 숲은 중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숲이란 나무가 무수히 모여 생긴 것이어서 철저하게 '상호의존적'이다. 이렇게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특이하게 우월한 수종과 자기보다 키가 유별나게 큰 나무들은 그 안에서 자연스레 죽어버린다. 아니, 오히려 숲이 이런 나무를 죽여 버린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주변의 다른 나무들은 그 죽은 나무를 양분으로 자라게 된다. 고립된 건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건축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이익으로 뭉친 사람들의 집단은 나무의 심과 같은 것이 되기 쉽다. 정치권력이든 문화권력이든 사회에는 나무속의 심과 같은 것이 많다. 그들은 이미 얻은 조직과 실적 그리고 유명세를 이용하여 그 곳에 계속 자리 잡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학생이 변해 가는 줄 모르고 교수가 강의실에서 언제나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면, 그는 공집합이 되고 있는 중이다. 또 학생이 좋은 학교에 입학했다는 이유만으로 늘 중심에 있을 것으로 여긴다면 그 또한 나무심과 같은 것이 되고 있는 중이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