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는 연민의 한계가 사회의 경계라고 말했다. 연민이란 타인의 상황에 자신을 위치시켜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이 능력이 있기에 우리는 주변의 이웃을 넘어 먼 지역의 사람의 사연에 공감하고, 그를 사회의 일원으로 인식할 수 있다. 연민의 조건은 정보다. 누군가의 삶을 앎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그를 안타까이 여길 수 있다. 이러한 정보전달과 사회통합 기능은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론은 단순히 정보를 전하고 안타까움을 묘사하는 데 멈춰서는 안 된다. 천재(天災)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불쌍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불쌍함이 아닌 부조리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연민을 파헤쳐 부조리를 비판하고 개선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창백한 팩트의 나열과 어설픈 동정은 힘이 없다.

이번 시설노동자 기사를 보면서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기사는 기전분회가 8차 단체협약을 마쳤다는 사건의 발생을 조목조목 잘 짚고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일반노조 기전분회, 서울대에 임금인상 등 협조 요청”이라는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고 긴 제목을 차치하더라도, 기사는 사건의 부조리함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그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지된 부조리는 기사 속에서 일회성 사건으로 둔갑했다.

2010년에도 75동을 찾은 시설노동자들이 있었다. 당시 시설노동자들은 내부적으로는 노조 간부들의 횡포에, 외부적으로는 열악한 처우에 신음하고 있었다. “간접고용의 굴레 속 곪아가는 시설 노동자(2010년 9월 13일 자)” 기획 역시 이러한 제보에서 시작됐다. 문제의 핵심에는 ‘간접고용’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대 본부는 매년 다른 용역업체를 통해 노동자를 고용했다. 노동자들은 서울대가 아닌, 매년 다른 업체에서 일한 것으로 처리됐기에 호봉이나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요구할 수 없었고, 본부가 책정한 100여 만원이라는 적은 월급 중에서 10만원이 넘는 금액이 용역업체에 돌아갔기에 처우 개선 역시 기대할 수 없었다. 매년 바뀌는 용역업체는 힘이 없었고, 이 가운데 고용 승계 등의 권한을 독점하게 된 시설노조 간부들은 일반 노조원들을 부당하게 대우했다. (진짜 문제는 간접고용이었다.) 해당 기사는 연민에서 시작됐지만 연민에 멈추지 않았기에 당시 총학생회의 연대를 이끌었고, 팩트에 기반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팩트까지 취재했기에 이후 민주노조의 출범을 앞당기는 데도 기여했다. ‘지난 0일’로 시작하는 기사도 충분히 뜨거울 수 있다.

물론 연민은 중요한 한 걸음이다. 『대학신문』을 통해 독자는 시설노동자들을 연민할 수 있고, 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언론이라면 그곳에 멈춰서는 안 된다. 단지 단체협약의 내용을 나열하거나 이름 대신 “어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사연을 안타까워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본부의 “검토해 보겠습니다”가 잔인한 만큼, 없어져야 하는 부조리를 그저 ‘잔인한 것’으로 치부하는 언론의 태도 역시 잔인한 것일 수 있다. 연민을 넘어 연대하는『대학신문』을 기대해본다.

이소영
소비자아동학부·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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