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한형 시간강사
국어국문학과

“1955년 1월에 창간된” 「현대문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반세기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월간 순수 문예지”로서 “현대문학을 건설한다는 사명으로 출발”하여 “창간 이래 단 한 번의 결호 없이 발행”된 “한국 문학의 자랑”이다. 홈페이지에 그렇게 나온다.
 

요즘 이 유서 깊은 잡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려온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현대문학」 9월호에 서강대 이태동 명예교수의 ‘에세이 비평’과 함께 범상치 않은 수필 네 편이 실렸다. 문예지에 문인협회 소속 수필가의 수필이 실렸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한데, 말들이 많다. 그 수필가가 박근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몇몇 일간지와 인터넷 매체는 발 빠르게 이 사실을 기사화했고, 이어 몇몇 일간지에는 이를 비판하는 칼럼이 즉각 게재되었다. 놀랍다. 일찍이 수필 몇 편의 게재가 이런 반향을 일으킨 적은, 단언컨대 없었다.
 

‘인문학의 위기’ 혹은 ‘문자 예술의 위기’라는데, 오히려 뒤늦게라도 누군가의 수필에 관심을 보여주니 이를 반갑게 받아들여야 할까? 15년 전의 글이라도 굳이 잡지에 실어야 했을 정도로 훌륭한 수필일까? 박근혜 대통령의 수필 자체는 그리 특별하달 것이 없다. 너무 당연한 말들이어서 범상하고, 범상해서 심심하다. ‘죽음의 순간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루하루 열정을 다해 살라’, ‘좋은 습관을 가지도록 노력하라’, ‘인생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나 이것이 곧 발전의 기회이기도 하니 이 기회를 잘 활용하라’ 등등의 전언은 사실 너무 당연한 말이어서 별 울림이 없다. 그렇다고 문체나 표현이 기발하거나 발상이 독창적인 것 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수필들이 ‘범상치 않은’ 수필이 된 것은, 전적으로 ‘박근혜’라는 저자의 이름 석 자 덕분이다.
 

이태동 교수는 필자와 달리 큰 감명을 받았는지, 박근혜 대통령의 수필이 “우리 수필 문단에서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일상적인 생활 수필과는 전혀 다른 수신에 관한 에세이로서 모럴리스트인 몽테뉴와 베이컨 수필의 전통을 잇는”다고 말한다. 이어 “실로 그의 에세이의 대부분은 우리들의 삶에 등불이 되는 아포리즘들이 가득한,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진주와도 같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대상에 대한 이런 정도의 극찬은 광고 문구에서나 보던 것이다. 게다가 범상치 않은 수필가 한 사람을 위해 범상한 한국 수필 문단 전체가 “지성과 철학이 빈곤한 수필들이 난무하는 한국문단”으로 도매급으로 취급되고 있다.
 

잊혔던 작가를 발굴하고 그 작가의 작품이 가진 의미를 대중에게 환기시켜 그것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것은 비평가의 권리이자 책무이다. 그렇더라도 ‘순수 문예지’ 「현대문학」의 이번 처사와 이태동 교수의 비평은 충분히 오해를 살 만하다. 왜 하필 현직 대통령의 작품인가. 유서 깊은 문예지가, 현직 대통령의 철지난 수필에 대한 찬사 일변도의 비평이 몰고 올 파장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당장 우리가 할 말은 정말 ‘순수’해도 너무 순수하다는 말 뿐이겠다.
 

「현대문학」이나 이태동 교수의 충정을 십분 헤아려, 수필가 혹은 교양 있는 문학인이 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위기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문학계 혹은 인문학계 일부의 애처롭고 눈물겨운 몸부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그렇게 해서 앞으로도 “단 한 번의 결호 없이” 간행된 「현대문학」이 “한국 문학의 자랑”으로 남을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렇지만 우선은 문학인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긍지보다, 대통령을 문학인으로 ‘만들기’ 위해 억지떼를 쓰는 것만 같다는 부끄러움이 앞서, 그저 씁쓸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수필가 박근혜’를 위해 한국 수필 문단 전체가 때 아닌 수모를 당한 것처럼, 「현대문학」을 위해 한국 문학 전체가, 혹은 인문학 전체가 수모를 당하는 것은 또 아닌지 괜히 벌써부터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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