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문화재란 '중요무형문화재 기능, 예능 보유자'를 일컫는 속칭으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121개 종목의 전통문화를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란 뜻을 담고 있다. 우리가 잊고 지내는 사이에도 이들은 각종 어려움 속에서 전통문화의 발전과 계승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온 생을 바쳐 전통이란 가치에 헌신해온 사람들, 『대학신문』에서는 3인의 인간문화재에게 그 여정을 물었다.

글·사진: 전수만 기자 nacer8912@snu.kr
 

▲ 2m가 넘는 공중에 줄이 걸렸다. 오늘은 김대균 선생의 둘째 제자가 직접 줄을 타고 스승은 밑에서 보조를 맞추며 어릿광대 역을 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바라보듯 선생의 눈은 줄을 타는 제자로부터 떨어질 줄 몰랐다. 김대균 선생 역시 철이 들기도 전 9살부터 줄을 타기 시작했다. 민속촌에서 근무하시는 아버지 덕에 그곳에서 생활하며 스승인 故 김영철 선생을 만난 인연으로 오늘까지 줄을 타고 있다.
줄을 탈 때 관객과의 소통으로 행복을 느낀다는 줄광대 김대균 선생. 그는 명맥이 끊어질 뻔했던 판줄을 각고의 노력 끝에 복원했다. 그의 줄타기는 단순 재주 뽐내기에 그칠 뻔 했던 줄타기를 소리, 재주, 재담이 복합된 공연예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어려움은 늘 존재 해왔다. 영화 「왕의 남자」가 흥행한 이후로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사회적 무관심 속에 줄을 타고 있다. 또 재주를 익히는게 육체적으로 힘들고 어렵다보니 마땅한 전수자가 쉬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문제다.
그래도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국내외 공연을 통해 줄타기를 알리는 데 노력하며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어린 제자에게 줄을 타게 시킨 것도 제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이 오늘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공연에 투영되길 바라는 스승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김대균 선생은 자신이 일종의 길라잡이가 돼 후학들에게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려 한다.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줄을 타는 것처럼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가운데 중’을 지키며 줄타기, 나아가 문화를 널리 알리길 바란다.
 

 

▲ 햇빛이 가득하던 여름날 강화도의 포구, 아침부터 배연신굿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만신 김금화 선생이 등장하자 포구는 더욱 활기찬 분위기로 바뀌었다. 선생은 굿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과 편안한 미소로 담소를 나누며 신딸들에게 행사 준비를 차근차근 지시했다. 이윽고 태평소 소리가 포구에 울려 퍼지며 풍어와 선원들의 안전을 바라는 배연신굿이 시작됐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꿋꿋이 무속 활동을 하는 김금화 선생은 이북에서 태어나 열일곱 어린나이에 큰 만신(무당)인 외할머니로부터 신내림을 받았다. 한국전쟁 이후 월남하여 무속활동을 계속 했지만 신당을 부수고 장승을 넘어뜨리던 미신 타파의 사회 분위기 속에 무속활동을 계속하기란 쉽지 않았다. 실제로 동료 무속인중 몇몇은 신을 버리고 무속활동을 포기했다. 그러나 김금화 선생은 신념을 가지고 무속의 길을 걸어갔다.
여전히 굿을 미신이라며 비하하는 시선도 존재하지만 이 길을 계속해서 걸어온 결과 무속활동을 우리의 전통문화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한미수교 100주년 행사 공연 등 해외에서도 공연을 여러 번 했고 올해에는 김금화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만신」이 개봉 예정이다. 김금화 선생은 “조금씩이나마 호의적으로 변해가는 사회적 분위기가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생과 사를 이어주는 만신으로서 역할을 다 할 것을 말했다. 선상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 “다리미가 뜨거워서 힘들어도 옷은 제대로 만들어야지.” 다리미를 탓하는 수강생의 투덜거림에 구혜자 선생의 부드럽지만 단단한 말이 꽃혔다. 선생은 거의 매일 대치동의 한국전통건축공예학교에서 침선(한복 만들기)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침선을 가르친다. 이날은 침선을 시작한지 1년차 이내의 초보 수강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옷을 대하는 자세 및 기초를 허투루 가르치는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대부분 주부나 의상학과 학생들로 이루어진 강좌에서 선생은 “오히려 가르치며 배우는게 많다”고 했다. 수강생들에게 기초적인 바느질을 가르치며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루하루 즐거운 마음으로 침선을 가르치는 구혜자 선생은 시어머니(초대 침선장 故정정완)로부터 침선을 배웠다. 먼저 바느질을 배워보겠다고 청했던 선생이었지만 친정어머니도 아니고 시어머니로부터 무언가를 배운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루하루 밤을 새우다시피 바느질을 연습하며 한복을 짓다보니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금씩 인정을 받게 되었고 침선장이라는 명예로운 이름도 작고하신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게 되었다. 선생은 만든 한복을 상업적으로 판매하기 보다는 한복을 연구하고 옛 복식사를 배워 재현하여 이 길을 지키려 한다. 사실 그 덕에 한복 짓는 일이 경제적으로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복을 평상복처럼 편히 입고 다닐 수 있게 되지 않더라도 우리의 혼을 이어가는 예의이자 정신으로서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구혜자 선생. 그 뜻은 계속해서 굳건히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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