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수도 양곤에서 다시 비행기로 1시간 40분. 미얀마의 서쪽 국경에 위치한 라카인 주(州)의 주도(州都) 시트웨(Sittwe)는 고요하고 한적했다. 아직 외지인의 방문이 많지 않은 인구 18만 명의 작은 도시로, 양곤의 혼잡한 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소도시의 조용한 외양도 심각한 종족 및 종교 갈등을 가리기는 어려웠다. 공항에서 툭툭(삼륜차)을 타고 다시 20여 분, 시트웨 도심의 무슬림 거주 지역인 ‘아웅민갈라’ 근방에 접어들자 소총으로 무장한 보안군이 곳곳에서 삼엄하게 거리를 감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른바 불교도와 무슬림의 충돌로 알려진 ‘2012년 라카인 폭동’이 만들어낸 모습이었다.

당시 폭동의 발단은 3명의 무슬림이 한 불교도 여성을 강간·살해했다는 사건에 대한 소문이었다. 지역 내 다수를 차지하며 불교를 믿는 라카인 족은 이슬람교를 따르는 소수민족인 로힝야 족에 대해 집단적 폭력사태를 일으켰던 것이다. 로힝야족을 증오하는 일군의 라카인 청년들은 칼과 죽창, 횃불 등을 들고 로힝야 거주지를 습격했고 결국 백여 명의 로힝야인이 죽고 한 로힝야 마을이 ‘전소’됐다. 이에 대항해 로힝야 족도 반격에 나서면서 대규모 유혈충돌이 벌어졌으나, 라카인 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지방정부와 보안군이 개입하면서 로힝야족에 대한 일방적인 ‘인종청소’로 이어졌다.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을 자국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은 당시 폭동으로 600여 명이 죽고 1,200명이 실종됐으며 로힝야족 8만 명이 집을 잃어 난민이 됐다고 보고했다.

특히 한때 시트웨 인구의 1/3을 차지했다고 하는 로힝야족은 폭동 이후 대부분 시 외곽의 난민촌으로 쫓겨났는데 ‘아웅민갈라’는 시트웨에 남은 극소수의 무슬림들이 모여 사는 작은 구역이었다. 무장한 라카인 보안군은 로힝야 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구역을 완전히 둘러싸고 모든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봉쇄에 가까웠다. 취재는 물론이고 물자 반입이나 구호활동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장 너머로는 불에 탄 모스크의 흔적이 여전했고, 곳곳에 폐허가 된 빈집이 보였다. ‘아웅민갈라’에 거주하는 로힝야인 마누(28) 씨는 “물, 식량, 옷 등 모든 물자가 부족하다”며 “물자반입이 금지돼 습격 1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아무런 복구를 진행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필자는 지역에서 로힝야족을 지원 중인 NGO ‘무국적자들(The Stateless)’과 협력해 ‘아웅민갈라’ 출입을 시도했으나, 필자의 목적이 취재임을 눈치챈 보안군이 막무가내로 출입을 통제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현재 국경없는의사회를 제외하고 ‘공식적으로는’ 어떤 비정부기구(NGO)나 국제기구의 출입도 허용되지 않는다.

일행은 다시 트럭을 타고 시 외곽의 난민(IDPs)캠프를 향했다. 시 외곽으로 이동하자 폭동의 후유증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동안 소수의 모스크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모든 모스크가 무장한 보안군에 의해 삼엄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일부 마을은 완전히 파괴된 것처럼 보였고, 형태가 온전한 마을도 잡초가 무성히 자라 인적이 없어 보였다.

시트웨 외곽에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난민촌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상황은 제각각이었다. 가장 상황이 좋은 쪽은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관리하는 공식 난민캠프들로, 유엔난민기구(UNHCR), 세계식량계획(UNWFP), 유니세프(UNICEF) 등에서 보내온 물자들로 그럭저럭 생활이 가능한 편이라고 한다. 그다음은 각종 NGO가 돕고 있는 지역으로, 주로 말레이시아 등 이슬람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구호단체가 많았다. 필자가 방문한 곳은 구호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는 비공식 캠프 중 하나로, 작은 마을에 매우 많은 나무집이 밀집해 있었다. 아이들은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있었고, 위생상태도 좋지 않아 보였다.
 

▲ 삽화: 강동석 기자 tbag@snu.kr

 

필자의 눈에 띈 광경 중 하나는 대나무로 엮은 집의 지붕을 덮어 둔 포댓자루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포댓자루에는 UNWFP라는 로고가 선명히 찍혀 있고, “50kg corn / gift of USA”라고 적혀있었다. 이 난민촌은 비공식 캠프였기 때문에 국제기구나 NGO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상한 일이었다. 알고 보니 인근의 캠프에서 식량 배급을 마치고 버려진 자루를 모아온 것이라고 했다. 아무런 물품지원이 없는 이들에게는 버려진 물건도 소중한 자원이었다.


난민촌에서 만난 로비야(45) 씨는 1월부터 비공식 캠프에 살고 있었다. 그는 지난해 6월 폭도들의 습격에 의해 집이 불탔는데, 지역 경찰들은 이를 막기는커녕 지켜만 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남동생은 폭도들과 싸우다 죽었으며, 계속되는 폭력이 두려워 이주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는 원래 ‘아웅민갈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검문소를 통과해 이곳에 오기 위해 수많은 관리에게 뇌물을 제공했다고 한다. 난민촌에서의 생활에 대해 묻자,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삶이지만 적어도 목숨의 위협을 받지는 않기에 ‘아웅민갈라’ 시절보다 편안하다고 대답했다. 비공식 캠프에 머무는 대부분의 로힝야인들은 로비야 씨처럼 폭동이 지나간 이후에 이주해 온 이들이었다. 폭동 당시에 발생한 피난민들은 공식 캠프에 수용됐지만, 몇 달 이후에 이주해 온 이들은 공식 캠프가 받아주지 않았다.

한편 일부 로힝야인들은 공식 캠프를 떠나 비공식 캠프로 이주해 오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느슨한 감시 때문이었다.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인들에게 정규시민이 아님을 나타내는 ‘화이트카드’를 나눠줬는데, 공식 캠프 주변에는 수많은 보안군 검문소가 있어 로힝야인의 이동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반면 비공식 캠프는 지원이 없는 대신 통제도 엄격하지 않아 몇몇 청년들은 낮 동안 인근 마을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어촌 등에서 극도로 열악한 일용직을 얻을 수 있을 뿐이며 미얀마 시민권자의 절반 정도의 임금을 받고 일한다고 한다. 시민권이 없기 때문이다. 국적 없는 이들은 자유로운 이동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는 것도, 집을 구하는 것도, 어떠한 방식의 의미 있는 경제행위도 불가능했다.

수십만 명의 로힝야인들은 박해를 피해 방글라데시, 태국 등 주변국으로 도망치고 있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외국인으로서의 신분을 증명할 길도, 이를 보증해 줄 정부도 없기에 밑바닥 인생을 살거나 난민캠프에 틀어박혀 희망 없는 삶을 살 뿐이다. 그러다가 운이 없으면 이국에서도 쫓겨나기 일쑤다. 2009년 태국으로 밀입국하던 로힝야 보트피플 일행은 태국 군대에 제지당한 뒤 바다에 버려졌으며, 방글라데시는 2012년 국제구호단체의 로힝야족 원조를 금지하기도 했다.

로힝야족은 누구인가?

로힝야족은 미얀마 서부의 라카인 주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 민족이다. 이들은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서 이슬람교를 믿으며, 중국-티베트 계열의 언어를 사용하는 미얀마족 및 라카인족과 달리 인도-아리아어계 언어를 사용하고, 인종적으로도 벵골인에 가깝다.

로힝야족은 자신들이 수 세대에 걸쳐 미얀마 국경 내에 거주해 왔다고 주장하지만, 미얀마 정부는 공식적으로 로힝야족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자국 내의 135개 소수민족을 인정하면서도, 로힝야족은 방글라데시에서 건너온 불법 이민자일 뿐 민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방글라데시 정부는 이들이 처음부터 미얀마 영토 내에 거주해 온 민족으로 방글라데시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로힝야족이 언제부터 라카인 지역에 살았는지는 역사적으로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라카인족은 1433년부터 강력한 음로하웅 왕국을 형성하고 벵골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때부터 상당수의 벵골인들이 상인, 노예 등으로 라카인에 정착해 초기 로힝야족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그 수가 증가한 것은 1826년 얀다보 조약으로 영국에 양도된 이후의 일로, 다수의 로힝야인들은 라카인과 벵골 지역이 영국 식민지로 통합되어있던 시절에 저렴한 노동력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로힝야족의 정확한 인구는 가늠하기 어렵다. 정부가 자국민으로 취급하지 않아 인구조사 대상에서도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2012년 라카인 폭동 직후 있었던 UN 조사에 따라 약 80만 명의 로힝야족이 미얀마에서 살고 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현재 미얀마 정부는 미얀마가 독립한 1948년 1월 4일 이전부터 미얀마에 거주하였음을 문서로 증명할 수 있는 로힝야인에 한해 시민권을 발급하고 있다. (그나마도 원래 기준은 1893년이었으나 정부의 ‘민정이양’으로 완화된 것이다.) 그러나 주로 하층 계급의 일자리에 종사해 온 로힝야인들 중 60년도 더 된 문서를 보유하고 있는 이는 사실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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