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서울대 이공계인, 그들을 주목하다 ④

베를린 장벽은 단순히 동서독의 분단만을 조장했을까. 물리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베를린 장벽이라는 분리대가 없었더라면 두 집단의 그토록 급격한 결합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며 이는 물질의 ‘불연속 상전이(相轉移) 현상’과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대학신문』에서는 이처럼 사회적 현상이나 물질의 상태가 급격히 변하는 ‘불연속 상전이 현상’이 어떤 조건 하에서 발생할 수 있는지를 규명한 강병남 교수(물리천문학부)를 만나봤다. 어려운 물리학 이론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인터뷰는 그가 직접 모형을 칠판에 그리는 등 강의식으로 진행됐다.

▲ 사진: 전근우 기자 aspara@snu.kr

‘상전이 현상’의 두 가지 얼굴

강 교수는 ‘상전이 현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간단한 실험을 소개했다. 그 실험은 쇠구슬과 유리구슬로 가득 채운 유리병 내부 상·하면에 전기판을 깔고 배터리를 연결하여 전기가 통하는지를 관측하는 실험이었다. 이 실험에서 연구자는 쇠구슬과 유리구슬의 구성비를 조절하는데 유리병은 쇠구슬의 비율이 낮을 때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 부도체 상태를 유지하다가 그 비율이 점점 커지면서 도체 상태로 변하게 된다. 이는 쇠구슬들이 서로 연결돼 전기가 흐르는 길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위와 아래를 연결하는 거시적 크기의 (쇠구슬) 집단이 만들어지는 현상을 ‘여과전이’라고 한다.

여과전이의 개념은 물리적 현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소셜네트워크에서의 거대 집단 출현, 전염병의 확산 현상 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런 여과전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곧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연속 상전이’였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통일된 독일이 급진적으로 형성된 것처럼 거대집단이 급진적으로 만들어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수학적 모형에 대한 질문은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그런 가운데 2009년 ‘폭발적 여과전이 모형’에 대한 기사가 사이언스지에 소개되면서 이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모형이 진정으로 불연속 여과전이를 설명하는 모형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또 불연속 상전이 현상이 일어나기 위해 필요조건 등 근본적인 원인에 대하여 연구된 바도 없었다.

▲ 삽화: 최지수 기자 orgol222@snu.kr

‘불연속 상전이’의 방아쇠를 찾아서

학자들은 이를 규명하기 위해 앞에서 소개한 여과 모형의 ‘쇠구슬 클러스터’에 해당하는, 소셜네트워크에서 서로 악수를 하고 지내는 집단의 성장 과정에 관심을 가졌다. 폭발적 여과전이 모형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형성되는 특정 네트워크 간의 만남(악수)을 억압함으로써 거대 집단의 형성을 막으면 나머지 소집단들 간의 폭발적인 결합에 따라 ‘불연속 상전이 현상’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즉, 베를린 장벽이라는 장애물이 동독과 서독 내의 여러 중소 집단들을 성장시키는 효과를 일으키게 되고 성장된 중소 집단들 사이의 결성이 점점 커져 궁극적으로는 동서독의 결합을 촉진한 것과 유사한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폭발적 여과전이 모형에서는 중소 집단 간의 결합을 어떻게 억압해야 하는지 수학적으로 규명하지는 않았기에 학계에선 계속해서 ‘불연속 상전이 현상’의 조건에 대한 논란을 이어갔다.

‘불연속 상전이 현상’의 조건을 수리적으로 규명하지 않아 생긴 논란을 종식시킨 연구자가 바로 강병남 교수다. 그는 폭발적 여과 모형이 거대 집단의 형성을 ‘임의로’ 억제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거대집단의 성장을 충분히 억압하기 위해선 “네트워크 전체를 조망하며 어떤 소집단을 어떤 소집단 사이를 차단시킬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즉, 집단성장을 억압시켜 불연속 상전이를 일으키려 하는 연구자는 폭발적 여과전이 모형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 조건을 규명하기 위해 강 교수는 여타 연구자들이 ‘연구의 보편성’을 위해 매달리던 무한대 차원에서 벗어나 가장 기본적인 차원, 2차원으로 돌아가 모델을 수식화하기 시작한다.

오히려 가장 간단한 차원에서 모델을 설계한 결과 강 교수는 시스템 전체 크기 N의 로그값(logN) 만큼 선택지가 있어야만 불연속 상전이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만 명의 사람이 있다고 가정할 때 특정 집단이 타집단과 결합하는 데 있어 4개 이상의 선택지를 가지고 있고 그 중 상대적으로 작은 집단과 결합하는 경우 급진적으로 대규모 집단의 출현이 보장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2차원에서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낸 강병남 교수는 그의 모델을 일반적 차원에까지 적용하는 데 성공한다. 이 논문은 지난 3월 사이언스지에 실렸으며 미국 수학회가 발간하는 4월 홍보지에 주목받는 연구결과로 소개됐다. 이런 공로로 강 교수는 지난 5월 ‘이달의 과학기술자상’을 수상했다.

그의 최근 연구 관심사는 여전히 불연속 상전이 현상이 차지하고 있다.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혹은 수증기가 물로 불연속적으로 변하는 과정은 섭씨100도라는 일정한 온도에서 이루어지는데, 온도는 같으나 밀도가 달라지는 두 상태로의 변화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지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다. 즉 수증기도 아니고 물도 아닌 이 ‘준안정 상태(metastable state)’의 정체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강 교수는 “준안정 상태 뿐만 아니라 불연속 상전이 현상에 대해 밝혀야 할 것이 아직 많다”며 꾸준히 자신의 연구를 이어나가겠다는 포부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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