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봉석 평론가
2020년 올림픽 개최지로 도쿄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문득 오토모 가츠히로의 만화 「아키라」가 떠올랐다. 2019년의 ‘네오 도쿄’를 배경으로 한 「아키라」에서는 다음 해의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키라」는 1982년 원인을 알 수 없는 대폭발로 도쿄가 파괴되고, 3차 대전이 발발하여 세계가 혼란에 빠져들었다는 것으로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38년이 지난 후 도쿄 만에는 네오 도쿄가 건설된다. 폐허 속에서 재건된 국가 혹은 도시 안, 일부에서는 올림픽에 대한 반대의 움직임이 일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선 올림픽에서 사용될 메인 스타디움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과거사를 그대로 미래에 투영한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었다.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미증유의 재앙과 함께 전쟁은 끝났고, 일본은 유일하게 핵폭탄의 피폭국이 되었다. 열패감에 시달리던 일본은 한국전쟁의 병참기지 역할을 수행하며 경제회복의 첫 단추를 끼웠고, 미국의 지원을 통해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은 일본이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이후 70년대의 일본은 고도성장을 거듭했고, 80년대에는 버블 상태에 진입했다. 돈이 넘쳐나던 시대로‚ 한없이 밝고 화사한 미래만이 약속된 것처럼 보이는거짓 낙원의 시대로.
 
아무리 평화의 시대를 구가해도 일본인에게 ‘핵’이란 상처는 깊숙하게 내재되어 있다. 「아키라」에 나오는 거대한 힘,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통제 불능의 힘은 ‘핵폭탄’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단지 핵폭탄만이 아니다. 냉전 시절에는 핵전쟁으로 인간의 종말을 상상했지만, 지금은 ‘원자력’ 자체의 위험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체르노빌에 이어 일본의 동북대지진으로 인한 원전사고는 ‘원자력’이 결코 통제 가능한 힘이 아님을 보여준다. 또한 단지 한 국가만의 문제도 아니다. 일본 원전에서 흘러나온 방사능 물질은 태평양으로 흘러들어가 바다를 오염시키고 있다. 중국 서쪽 해안에 집중적으로 지어질 원자력 발전소에 문제가 생긴다면 바로 한국이 타격을 받는다.
 
원전을 비롯한 통제 불능의 사고가 생겼을 때, 사회의 시스템 자체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도 문제다. 일본의 원전은 사고 이후 수습 불가능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정부의 정보 은폐, 원전 마피아로 불리는 거대한 이익 세력 등으로 인해 국가의 기능 자체가 마비되고 있는 것이다. 「아키라」의 통제 불능의 거대한 힘처럼 지금 일본 사회에는 국가의 ‘제어 기능’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원전만이 아니라 군국주의로 나아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게다가 일본은 다이쇼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군국주의로 이행한 과거사도 있다. 그렇다면 「아키라」가 예언한 것은 단지 2020년의 올림픽만이 아니라 통제 불능의 사회로 치닫고 있는 지금의 일본일지도 모른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가 연재되기 시작한 것은 1982년.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진 것은 1988년이다. 버블의 한복판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오토모는 장밋빛 환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대폭발, 3차 대전을 거친 후 건설된 네오 도쿄는 최첨단 과학으로 건설된 도시였지만 폭력과 약물, 부정부패, 계층 갈등, 반정부 시위와 군부의 무력 진압, 신흥종교 등으로 얼룩진 ‘불량’ 사회였다. 첨단의 도시에는 과거의 상흔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칭 ‘건강 우량 불량 소년’들인 폭주족들은 사라진 도시 ‘도쿄’의 흔적이 남은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그들이야말로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자유로운 청춘이다.
 
중학교 시절 만화가를 꿈꾸었던 오토모 가츠히로는 ‘학교 수업보다는 「이지라이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등 아메리칸 뉴 시네마와 일본 로망 포르노를 보며 영화관에 틀어박혀 있길 좋아하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고등학생부터는 영화감독 지망이었지만, 몰락 일로였던 일본 영화계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일종의 우회로로서 만화를 선택했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초기 작품은 아메리칸 뉴 시네마에서 영향을 받은 ‘혁명은 끝났지만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시대의 일상’이었다. 록과 재즈, 약물 등이 배경이 되는 나른한 70년대, 유희적인 70년대. 그리고 60년대 말부터 일본에서 일어난 SF붐을 통해, 사이버펑크에서 영향을 받은 오토모의 세계는 「동몽」과 「아키라」에서 만개한다.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파괴된 도시를 재건했지만, 이제는 행복만이 존재해야 하지만 오히려 혼란만이 가중된다. 정치가들은 국회에 모여 어떤 프로젝트에 돈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싸우고 있다. 신흥 종교는 불안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을 이리저리 조종한다. 국가에서는 ‘힘’을 얻기 위해 비밀 실험을 하고,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자 책임 회피를 하려 동분서주한다. 정치, 경제, 종교 그 어디도 ‘국민’을 책임지지 않는다. 정치가, 경제인, 종교인들이 우아하게 다투는 동안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다. 영락없는 디스토피아다.
 
그것은 80년대 일본의 모습이기도 했다. 경제 부흥은 이루어졌고 일본은 선진국이 되었지만, 사회는 뒤틀리고 있었다. 끔직한 살인사건을 저지른 ‘소년 A’로 대변되는 어두운 사회문제들은 당시 일본 사회의 그림자였다. 장밋빛 미래를 위해 현실의 어두운 것, 외면하고 싶은 것들을 꼭꼭 숨겨두었다. ‘소비’라는 거대한 환영으로 모든 어둠을 가리고 있었다. 2019년의 네오 도쿄는, 80년대의 도쿄를 투영한 어두운 미래였다.
 
오토모에게 80년대의 일본은 너무나도 불투명했고, 불안했다. 그 마음을 「아키라」에 담았다. 일본의 부흥을 일구어낸 과학기술에 대한 찬양과 사이비 종교가 겹치고, 혁명을 동경하면서도 회의하는 모습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들의 이야기’였다. 그러면서도 오토모는 약진해가는 일본 경제를 보며 한편으로 안도했다. 불안과 혼란을, 언젠가는 이겨낼 것이라고 단순하게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키라」는 묘하게 희망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실제로 「아키라」의 ‘건강 우량 불량 소년’은 당시 폭주족들의 이상향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키라」는 ‘미래는 우리들의 손으로 열어야 한다’는 테마를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다. 당시 「아키라」는 그림과 연출에 있어서는 탁월한 평가를 받았지만, 이후 내용 면에서는 엄청난 아이디어와 설정에 비해 흐지부지되었다는 평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는 「아키라」에서 중요한 것은 ‘희망’이다. 힘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지리멸렬한 세계에서, 우리가 기댈 것은 결국 ‘희망’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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