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롤랑 바르트, 『밝은 방』

▲ 홍석경 교수
언론정보학과

디지털 사진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왜 사진을 찍는지, 사진을 찍히는 경험이 무엇인지, 왜 사진에게 감동을 받는지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고 폐부를 찌르는 책을 고르라면 바로 프랑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의 전혀 기호학적이지 않은 이 책, 『밝은 방』을 권한다. 밝은 방(La chambre claire)은 카메라 암실(la chambre noire)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이 아닌 인간의 심리 속에서 벌어지는 사진의 존재에 대한 사색 노트다. 존재에 대한 사진의 명증성, 즉 사진의 대상이 거기 있었음, 그것이 존재했음에 대한 확신을 제공하기 때문에 암실이 아닌 ‘밝은 방’이라고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이다.

나에게 한권의 책은 꼭 일련의 텍스트로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영향력있는 책일수록, 한 연구자의 궤적에 흔적을 남기는 책일수록 더욱 그 책은 텍스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법인데, 바르트의 이 책이 나에겐 대표적으로 그렇다. 내가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을 처음 읽은 것은 1987년, 바르트의 이 책이 출판된 지 7년 후였다. 바르트는 이 책을 마지막으로, 80년에 무심한 교통사고로 65세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나에게 바르트를 가르쳐주시고 이 책을 손수 건네주신 불문과의 김현 교수님은, 내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다음해인 90년에 작고하셨다. 바르트의 이 책이 어머니의 죽음을 사진을 통해 진혼하는, 아니 사진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듯이, 나에게 이 책은 바르트와 김현 교수님의 존재를 끊임없이 재확인시켜주며 아쉬운 이 두 분의 스승을 진혼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그 자체가 나에게 하나의 ‘풍크툼(Punctum)’으로서, 영상문화에 대한 나의 관심의 근원을 환기시키는, 영원한 지적 경험의 분리 불가능한 세트로서 한꺼번에 다가온다.

이 책은 바르트가 몇 개의 사진을 통해 경험했던 놀라운 사진의 능력에 대한 현상학적 사색을 기록한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자전적 경험을 통한 사색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바르트는 이 책 속에서 사진경험의 본질에 대해 수려한 문장의 설명과 명철한 사례를 제공하기 때문에, 독자는 20세기 가장 뛰어난 비평가 중 한사람인 바르트의 사고 궤적을 따라 그 과정을 동반하는 지적 사치를 누릴 수 있다. 나폴레옹의 막내동생의 사진을 봤을 때 느꼈던 “황제를 직접보았던 눈을 보고있다….”는 놀라움은 황제와 황제를 보았던 눈과 카메라, 카메라가 광각한 존재에 대한 증명으로서의 사진,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나 사이의 존재론적 고리에서 온다. 이 고리는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존재에의 확신을 생산하며 우리를 ‘찌른다’.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즉 내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사진은 우리가 그 닮음을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사진에 대한 우리의 주된 착각인 유사성(즉 나를 닮은 내 사진, 어머니를 닮은 어머니 사진)의 관계를 뛰어넘어 사진의 본질, 즉, 어머니의 죽음의 환유라는 놀라움을 생산할 뿐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다섯 살 때 사진은 “그녀가 존재했었다(즉, 그녀는 이미 과거이고 죽은 자이다)”는 것을 명증함으로서 사진의 관람자인 바르트를 ‘찌른다’.

이처럼 바르트는 책 전체를 통해 사진은 19세기가 발견한, 우리가 죽음을 경험하는 또다른 방식이라고 말한다. 사진은 시간을 압축해 정지된 순간에 대상물의 과거와 보는 나의 현재, 그리고 사라질 것이 확실한 대상물의 미래를 동시에 담는다. 모든 사진에서 ‘그들’은 이미 죽었거나 곧 죽을 존재이다. 사진은 모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사진 속에 있는 10살의 나는, 돌아가신 증조 할머니만큼이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존재이다. 결혼예복을 입고 서있는 젊은 커플의 행복은 결혼 30년의 부부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픽션인 것이다. 모든 부모가 자식의 어린 시절의 사진에 집착하는 이유 또한 이처럼 모든 사라지는 것의 아름다움에의 천착이다.

이처럼 존재의 증명인 사진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분류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단 한번 있었던 일, 지구상에 ‘우연’히 있었던 어떤 순간을 찍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사진의 코드화 될 수 없으나 우리를 ‘찌르는’ 능력을 스투디움(studium)과 구분되는 풍크툼(punctum)이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사진은 문화가 각인된 분석 가능한 내용인 스투디움(studium)과, 스투디움을 방해하는 요소, 점처럼 폐부를 찌르는 우연하고도 설명하기 힘드는 이끌림의 요소인 풍크툼(punctum)을 담고 있다. 위에 설명한 사진의 본질은 이 풍크툼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지금까지의 책 내용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 『밝은 방』은 사진 중에도 인물사진에 중점을 둔 사색이다. 사진의 본질이 이렇기에, 초상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란 “내 자신이 마치 타인처럼 다가오는 일”이며, 자기동일성에 관한 의식의 분열이다.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가 대상화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유예된 죽음에 대한 경미한 경험이라는 것이다. 사진사는 사진이 죽음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미소를, 제스츄어를, 배경을 연출하고, 때로는 사진 위에 화장을 하기도 한다. 죽음은 사진의 본질(eidos)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진을 아무리 살아있는 것, 생생하게 보이려 필사적인 노력을 할지라도, 그것은 사실 죽음의 불안에 대한 가공적인 부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삽화: 최지수 기자 orgol222@snu.kr

이 책은 디지털 혁명으로 엄청난 사진 혁명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그것의 의미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더 이상 사진을 인화하지 않는다. 인화라는 특별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돌박이 아기이거나 결혼식을 치르는 신랑 신부이거나 환갑을 맞아야 한다! 빛의 작용이기는 하나 빛과 나와의 지표적(indexical) 고리가 끊어진 채, 디테일과 스펙터클(포토샵!), 엄청난 양과 속도가 이 강조되는 고화상 모바일 폰의 21세기를 살고 있다. 바르트의 정신을 찌르던 사진 속 ‘영(spectre)’은 ‘광경(spectacle)에 자리를 넘겨주고, 우리는 보지 않고도(더 이상 암실에 비친 상을 보려 눈을 들이대지 않는다) 마치 장님처럼 팔을 뻗어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인류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자신과 자신의 일상에 대한 사진을 남기고 있다.

우리는 왜 일상에 대한 그 많은 사진을 생산하고 소셜 네트워크에 그것을 전시하고 공유하는가? 한국의 청소년과 20대가 그토록 수많은 셀카를 찍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특히 자신의 팔을 최대한 뻗어 스스로를 대상화 해서 찍는 셀카야 말로, 바르트의 비평을 빈다면, 자신의 죽음을 일상적으로 재생산하는 과정이다. 새털처럼 가벼워진 디지털 이미지 속 정지된 시간의 ‘나’는 이미 미래의 죽음을 담고 있다. 무덤도, 장례도 그 상징성을 읽어가는 21세기. 의학은 노화 방지에 일념하고 있고, 영원한 삶의 가능성을 말한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는 언제 어떻게 의학적으로 죽을 것인지 알 수 없는 삶을 영위한다.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죽는 것은 젊음뿐이기에 그토록 셀카에 전념하는 것일까? 내가 가장 젊은 날이 바로 오늘이기에 그토록 오늘을 죽음으로 재생하는 것일까.

이처럼 꼬리를 문 사색을 가져오는 바르트의 상념을 담은 이 책은, 사진을 공부하는, 아니 현대문화와 영상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모든 인문사회계 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은 텍스트이다. 특히 멜랑꼴리가 우세한 가을이라면, 두껍지도 않고 시처럼 읽히는 사진을 통한 진혼곡인 이 책을 추천한다. 올해의 가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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