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인류는 ‘인간 게놈프로젝트’를 통해 인간의 유전자 서열을 읽어내는 데 성공했고 이는 1969년 인류 최초의 달 착륙과 비견될 만한 과학적 성과로 주목 받았다. 사람들은 ‘인간의 설계도’를 얻었으니 곧 수명이 수십 년은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유전자 서열만으로는 기대했던 효과를 얻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의 저자 페터 슈포르크는 게놈프로젝트가 ‘인간에게 별로 유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달 착륙과 유사하다고 꼬집는다. 그는 게놈프로젝트를 통해 유전학의 관심이 “유전자 서열에서 유전자 조절로 이동했다”며 “‘후성유전학’이 이끌어갈 ‘포스트 게놈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한다.

유전자 서열과 유전자 조절의 차이는 일란성 쌍둥이 연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일란성 쌍둥이는 정확히 같은 유전자 서열을 갖고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서로 다른 모습을 갖기도 하고 서로 다른 질병에 걸리기도 한다. 만약 유전자 서열이 생명 현상의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면 서로 다른 일란성 쌍둥이의 상태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페터 슈포르크는 유전자의 발현이 조절되는 기작(機作)들이 그 차이를 만든다고 설명한다. 즉, 환경적 요인이 일란성 쌍둥이간의 차이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페터 슈포르크는 “인간의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유전자 서열을 ‘제1의 암호’라 하면 그 유전자가 조절되는 과정을 ‘제2의 암호’라 할 수 있다”며 “‘제2의 암호’가 ‘제1의 암호’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두 개의 암호는 각각 ‘본성(nature)’과 ‘양육(nurture)’을 대표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 두 가지 암호가 동시에 고려돼야 생명 현상을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1의 암호’인 유전자 서열을 다루는 기존 유전학과 달리 ‘제2의 암호’인 유전자 조절을 다루는 학문인 후성유전학은 인간에게 유전자의 작용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두 번째 암호는 첫 번째 암호처럼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처한 환경에 따라 유전자 조절은 달라질 수 있고 인간의 행동에 따라 두 번째 암호에 변화를 주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운동은 도파민의 분비를 촉진해 우울증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 더 나아가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게 되면 도파민을 분비하는 유전자의 활성 패턴이 변화하며 이전에 비해 우울증에 강인한 성격을 갖게 된다. 꾸준한 운동이 몸에 도파민을 분비하는 기억을 새기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생물을 유전자의 생존기계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후성유전학에 따르면 인간은 유전자의 기계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후성유전학자들은 “인간의 행동이 바뀌면 유전자 조절이 달라져 동일한 유전자 서열을 가지고도 완전히 다른 몸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후성유전학의 발전을 통해 ‘유전자 조종법’이 낱낱이 밝혀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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