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명선 강사
수의학과

 살다보면 판도라의 상자 가장 마지막에 남아 있어야 할 것은 희망이 아니라 웃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의미에서 영국 작가인 더글라스 아담스(Douglas Noel Adams, 1952~2001)는 시대의 문장가이며, 그의 작품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는 인류에 공헌한 바가 크다.

우주 고속도로 건설 계획에 의해 지구가 제거되는 상황에서도 시종일관 유쾌한 이 소설은 재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이른바 ‘궁극적인 질문’이다. 소설에서 사람들은 삶과 진리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찾기 위해 어마어마한 연산과 추론 능력을 갖춘 컴퓨터를 개발했다. 어마어마한 시간 동안 프로그램을 돌린 컴퓨터가 내놓은 대답은 ‘42’였다. 답을 받아든 사람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컴퓨터에게 물었다.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 42란 말인가?” 컴퓨터는 대답했다. “당신들이 원한 것은 궁극적인 해답이지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그 질문을 알고 싶다면 훨씬 더 능력이 좋은 컴퓨터가 필요하고 어마어마한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설계된 새로운 컴퓨터가 바로 지구다.

학교로 오는 버스 안에서 들려오는 학생들의 대화는 상당히 진지하다. 강의나 세미나에서 제시되는 조별 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어떤 정책이나 이론에 대해 의견을 펴기도 한다. 강의시간에도 그 진지함은 계속된다. 그러나 학생들의 질문이나 대안들이 가끔씩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질문은 대개 쓸모 있는 해답에 빠르고 쉽게 도달하는 법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답을 내는 데 선수들이다. 사회 전반에서, 각 분야에서 문제해결능력은 리더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요건이다. 우리는 문제가 주어진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더라도 결국 해답을 찾아낼 것이다. 그런데 가끔 이 노력이 가치 있는 질문이나 가정을 분석하는 데 기울여지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또한, 그 해답이 문제를 푼다는 그 자체 이외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반문해보게 된다. 그 질문이나 해답을 찾는 일에 있어 실용성이나 쓸모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낭만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연구, 또는 아무도 하지 않을 연구라고 생각되는 주제에 대해 정보를 찾고 싶으면 박사논문 목록을 뒤져보면 된다고 누군가 우스갯소리를 했던 기억이 난다. 유명한 학술지에 실릴 것도 아니고, 큰 연구비를 수주할 수 있는 것, 특허를 획득할 만한 것들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창의적이거나 재미있는 질문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궁극적인 질문에 오히려 더 다가가는 과정이 아닐까.
 
주어진 문제를 파악하는 것과 질문을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자신의 소설이 소설의 의미와는 다르게 영화화 된 것에 실망한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영화화 될 수 없는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스스로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는 「불멸」을 창작했다. 그는 「불멸」에서 제한된 수의 몸짓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사람들은 창의적이지 않은 그 제한된 몸짓을 너도 나도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답이란 건 그다지 창의적이지도, 다양하지도 않을지 모른다. 몇 가지 정해진 답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 우리는 의미 있는 질문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리고 좀 더 과장하자면 그 질문을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몰두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그냥 ‘그럴 듯하지만 텅 빈’, ‘진지하지만 재미없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해답에 골몰한 나머지 우리가 컴퓨터처럼 사회에 내어놓는 궁극적인 대답이 ‘42’라면 너무 당황스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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