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내 구성원의 절대다수인 학생
학내 의사결정 구조에선 주변인
당위에만 그치는 한계 넘어
유리병 환상에서 벗어나야

▲ 강윤희
부편집장

평소라면 20~30cm까지 뛸 수 있던 벼룩을 유리병에 가둬 놓으면 나중에는 딱 유리병의 높이만큼만 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유리병에서 나와 뜨거운 바닥에 닿은 벼룩은 다시 평소의 높이만큼 뛰어 오른다. ‘유리병 속 벼룩’은 발전이나 성공에서 한계의 ‘무용성’을 일깨우는 대표적인 비유다.

자기계발서에서 마주칠 수 있을 법한 이 비유가 요즈음 학생사회와 자주 겹쳐진다. 시작은 법인화 이후 끊임없이 논란이 된 평의원회의 위상 문제가 작은 걸음이나마 개선의 길로 돌아선 것에서부터다. 1년여 간 평의원회를 중심으로 정관 개정이 활발히 논의됐고 급기야 이번 학기, 평의원회에 의결권이 일부 위임되는 등의 내용이 담긴 정관 개정안이 이사회에 상정됐다.
 
법인화의 부작용으로 손 꼽혀 왔던 ‘오답’들이 하나하나 답을 찾아나가고 있는 모양새지만 그 과정에서 학생들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정관 개정의 움직임은 숨 가쁘게 진행 중인데 아직도 학생의 평의원회 의결권 확보는 요원하다. 적극적인 의사 개진으로 권리를 찾아나가는 교수, 직원들과는 다르게 대학 운영에 학생들의 참여는 가능성을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로 먼 나라 이야기다.당위만 따지고 보자. 학내 구성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학생이 학교 운영의 전반적인 결정에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은 지극히 민주적이다. 그런데도 항상 회자되는 것은 당위뿐, 이 선을 넘어서 제도의 개편이라는 궁극점에 도달한 적은 드물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학생들이 학내 의결구조에서 배제되는 것은 당연시돼왔다. 동시에 개개인도 모르는 사이 학생들은 서서히 유리병의 한계에 갇혀버렸다. 레지덴셜 칼리지(RC) 도입 여부, 교양 교육 개편, 신축건물 공간 배정 등 결정내릴 사안은 산적해있지만 학생들의 의견이 반영될 틈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설사 교육을 받고 건물을 이용하는 주체가 학생이라도 말이다. 분명 30cm를 뛸 당위도, 능력도 갖추고 있지만 학생들이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는 유리병의 높이 정도로 한정됐다.
 
그나마 역대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민주적 의사결정권의 요구가 표출되고는 있지만 이것만으로 제도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엔 역부족인 듯싶다. 한 예를 들자면, 학생이 평의원회에서 의결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법인화법 자체가 뜯어고쳐져야 한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법인화 법을 평의원회가 개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도, 본부도, 심지어 총장이라도 법 개정을 누군가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없다. 요구사항을 관철시킬 뚜렷한 주체도 없는 상황에서 학생의 의결권 요구는 그야말로 달걀로 바위치기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이 같은 상황에서 누군가가 유리병을 벗겨주길 목메고 기다리자면 민주적 의사결정의 주체로서 학생은 오늘도 내일도 먼 나라 이야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제는 학생이 유리병을 뛰어넘고 나와야 할 차례다.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결정에 의심을 가지고, 학내 주요 사안들에 직접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리를 요청해야 한다.
 
지난 학기 『대학신문』이 해외 특집기사로 다뤘던 UC버클리 사례는 이 모든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대학신문』2013년 3월 11일 자) 학생이 이사회를 비롯해 재정위원회 등에서 사안을 결정하고 총장 임명 시 거부권까지 행사하는 UC버클리의 모습은 학생자치의 모범사례였다. 저절로 인 변화는 아니었다. 버클리대 총학생회장은 “학생들의 높은 관심이 학생사회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원동력”이라고 설명했다. UC버클리를 해외의 이상향으로 남겨두느냐 우리의 상황을 바꾸느냐는 학생들의 손에 달렸다. 유리병의 한계를 뛰어 넘어 진정 학내 민주주의 의사결정의 주체로 선 학생들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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