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오페라’라고 하면 지루하고 어려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거에 오페라는 상당히 대중적인 장르였으며 당대의 정치적·사회적 흐름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2013년은 오페라의 양대 산맥 주세페 베르디와 리하르트 바그너가 탄생한 지 나란히 200주년을 맞은 해다. 두 거장의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 각각 이탈리아와 독일의 사회상을 담아내고 또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파헤쳐 보자.
 
시대를 읽는 창,19세기 오페라의 ‘발단’
 
앙코르 요청은 끊이질 않는다. 공연이 끝나자 그가 탄 차는 열광한 관객들로 둘러싸여 전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군중은 플랜카드와 야광봉을 든 채 공연장에서 호텔까지 행진한다. 흥분한 관객들을 달래기 위한 즉석 무대가 호텔 창문 밑에서 벌어지며, 그의 이름을 외치는 환호성이 밤새 울려 퍼진다.
 
위 장면을 읽고 어느 인기 가수의 콘서트가 끝난 후를 떠올렸는가? 여기서 야광봉을 ‘횃불’로, 자동차를 ‘마차’로 바꾸면, 140년 전 오페라 「아이다」가 공연된 직후의 장면이 된다. 사람들이 열광한 대상은 다름 아닌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페라를 소수만 즐길 수 있는 ‘어려운’ 예술이라고 생각하지만, 19세기 유럽에서 오페라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물론 오페라가 귀족들이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저택에서 화려한 행사를 벌인 데서 기원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근대 사회가 태동하면서 무역과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점차 귀족들의 문화생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오페라에 대한 수요 역시 늘어났고 1637년에는 최초의 상업적인 오페라 극장이 개관하게 됐다. 민은기 교수(작곡과)는 이를 계기로 “이전엔 초대받지 못한 자는 즐길 수 없었던 공연을 입장료만 내면 볼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당시에도 오페라는 제작비용이 워낙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극장 운영자와 작곡가 모두의 관심은 ‘흥행’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높은 수익을 목적으로 거대 자본을 들여 만든다는 점에서 오늘날 블록버스터 영화의 제작조건과 비슷하다. 박윤경 강사(작곡과)는 “관객을 끌기 위해 대중에게 친숙한 문학 작품이나 당시 사회 현안 등을 오페라의 소재로 선택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처럼 수익 창출을 위해서라도 대중과 호흡해야 했던 오페라는 자연스럽게 그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게 된다.
 
오페라가 시대상을 충실히 담아낼 수 있었던 데는 종합예술로서의 특성도 한몫 했다. 이용숙 평론가는 “오페라는 음악과 이야기가 절묘하게 결합돼 있다”고 말한다. 오페라는 음악, 연기, 무용, 무대 연출 등 무수한 예술 장르들이 함께 어우러져 이들을 따로 감상했을 때와는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연극배우가 ‘슬프다’고 대사를 읊을 때보다 비통한 아리아를 부를 때, 그리고 거기에 어두운 조명과 오케스트라가 뒷받침 될 때 감정은 극대화된다. 웅장한 합창과 절절한 아리아는 대중들의 심금을 울렸고 현란한 무용과 화려한 무대의상까지 볼거리도 풍성했다. 지금처럼 글을 읽을 수 있는 인구도 많지 않던 시절 소설이나 시보단 오페라가 대중의 마음을 끌 수 있었던 이유다.
 
얼핏 보기에 공통점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베르디와 바그너는 이런 점에서 의외의 유사성을 보인다. 민은기 교수는 “베르디와 바그너는 같은 해에 태어나 당대의 모습을 각자의 방식으로 작품 속에 풀어냈기에 비교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19세기 유럽 전역에는 민족주의가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이탈리아와 독일은 작은 도시국가들로 나뉘어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통일을 이루는 등 정치·사회적인 상황도 비슷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대표 작곡가 베르디와 바그너의 오페라는 이처럼 민족주의가 부상하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훗날 두 사람의 작품은 각각 파시즘과 나치즘 세력에 의해 악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두 거장의 오페라가 어떤 방식으로 당시 사회상을 담아냈고 또 대중에게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미쳤을까?
 
베르디, 민중의 소망을 ‘전개’하다
 
하이마트 CF곡으로도 잘 알려진 「리골레토」의 ‘여자의 마음’, 「라트라비아타」의 ‘축배의 노래’ 등 베르디는 알고 보면 우리에게도 상당히 친숙한 작곡가다. 흔히 그는 삼각관계로 대변되는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를 아름다운 멜로디로 풀어내는 등 대중적인 스타일을 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베르디가 ‘국민 작곡가’로 사랑받을 수 있었던 데엔 관객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작품들의 공이 크다.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도시국가로 분열돼 오스트리아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었다. 민중들은 자유롭고 통일된 조국을 염원했다. 1842년 발표된 베르디의 「나부코」는 바빌론으로 끌려간 히브리 노예들이 부르는 합창곡이 유명하다. “오 빼앗긴 나의 위대한 조국, 잃어버린 나의 아름다운 조국이여!” 나라 잃은 히브리 노예들의 애절한 합창은 오스트리아에 적대감을 품고 있던 관객들의 애국심에 불을 질렀다. 이는 무명 작곡가였던 베르디를 한순간에 ‘스타’의 위치로 끌어 올렸다.
 
베르디가 차기 작품으로 선택한 「에르나니」도 애국적 성격의 오페라의 계보를 잇는다. 주인공 에르나니는 국왕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두목으로 엘비라와 사랑하는 사이다. 그런데 엘비라는 국왕과 실바 공작의 구혼을 받아 강제로 결혼할 위기에 처해 있다. 전수연 교수(연세대학교 사학과)는 저서 『베르디 오페라, 이탈리아를 노래하다』에서 “1844년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을 놓고 본다면 늙은이들의 일방적인 구애에 고통 받는 엘비라를 구할 사명을 지닌 젊은 에르나니는 청년 이탈리아를 상징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에르나니와 산적들이 우렁차게 “우리의 팔, 우리의 가슴으로 투쟁하자”라고 합창했을 때 관객들은 오스트리아에 대한 혁명을 떠올렸다. 관객들은 “이탈리아 만세! 베르디 만세!”를 외쳤고, 애국적인 문구가 적힌 플랜카드를 흔들며 환호했다.
 
베르디 작품들의 울림은 극장에서 그치지 않았다. 1848년 제1차 이탈리아 혁명 때는 ‘에르나니 모자’가 시위 필수품으로 등장했다. 시민들은 오페라 무대 의상을 입고 행진했다. 베르디는 「레냐노 전투」 등 민족주의 감정을 일으키는 작품을 계속 작곡하며 민족영웅으로 떠오른다. 박윤경 교수는 “베르디는 나중에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하였으며 이탈리아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한편 베르디의 작품에는 19세기 이탈리아의 사회상이 잘 녹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윤경 교수는 “이전의 오페라가 환상적인 신화나 귀족들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베르디는 신분 갈등이나 하층민의 삶 등 현실적인 문제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공주나 귀족의 자리를 광대, 곱사등이, 집시들이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대중들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귀족의 이야기보다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인물들에게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이는 「라 트라비아타」에서 고급 매춘부인 ‘코르티잔’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으로 급속한 근대화를 겪으며 많은 시골 처녀들이 도시로 무작정 상경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매춘부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유한 남성들 사이에선 아내 외에 따로 애인을 두는 것이 유행했는데, 둘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 등 왜곡된 성문화가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베르디는 「라 트라비아타」에서 진실한 사랑 대신 향락을 즐기면서도 자신의 가문의 체면만 지키는 당대 부르주아들의 세태를 비판하고자 했다. 「라 트라비아타」가 고전 의상이 아닌 19세기 당시의 의상을 사용하려 했던 첫 번째 오페라였으며 작품의 모델이 된 몇몇 인물들이 생존해 있었다는 사실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베르디는 역사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든, 그 당시의 문제를 다루든 ‘현재’의 사회와 소통하는 오페라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베르디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조국’을 강조하는 그의 오페라는 특유의 대중성 때문에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활용되기도 하였다. 박윤경 교수는 “음악이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은 흔히 살펴볼 수 있는 일”이라며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음악 분야에서 선진국이었던 점을 강조해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생전에 베르디가 이탈리아의 제국주의를 비판했으며 교회의 권위주의를 반대했다는 점에서 반파시스트 진영에서도 그의 오페라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전수연 교수는 “파시스트와 반파시스트 진영 모두에게 베르디는 소중했다”고 말했다.
 
바그너, 독일 정신의 ‘절정’을 표현하다
 
이탈리아에 베르디가 있다면, 독일에는 바그너가 있다. 바그너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분열돼 있던 독일이 통일을 이루는 격동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에 맞춰 그는 독일 민족의 우월감을 고취시키는 작품을 썼다. 바그너는 독일이 프랑스 군에 맞서 봉기했던 해에 태어났다. 그는 1848년 드레스덴 혁명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혁명 실패 후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바그너의 마음 속엔 조국 독일에 대한 그리움이 싹텄다. 추방령이 풀리고 그는 독일 국왕 루드비히 2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오페라사에 길이 남을 혁신적인 작품들을 남긴다.
 
대부분의 오페라가 이탈리아어로 쓰이던 시절 바그너는 진정한 ‘독일만의’ 오페라를 만들고자 했다. 베르디가 현실의 세계를 그려냈다면, 바그너는 독일 신화를 소재로 독일어 발음에 적합한 대본을 직접 썼다. 또 바그너는 진정한 예술은 문학과 음악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바그너협회 임재인 총무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가수의 노래를 중요시하는 반면 바그너의 오페라는 극의 내용을 우선시해 음악은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오페라에선 극의 분위기나 등장인물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한 오케스트라의 비중이 높다. 바그너는 혁신적인 연출도 시도했다. 그는 1876년 「발퀴레」에서 말을 와이어에 매달아 공중에 띄우는 등 당시로선 최첨단의 기술을 동원해 웅장한 무대를 구현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중 「로엔그린」은 ‘강력한 통일국가 독일’에 대한 열망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오늘날 신부가 입장할 때 연주되는 곡도 「로엔그린」의 3막에서 등장한다. 그는 게르만 신화와 중세 독일 서사시를 종합해서 하나의 오페라로 탄생시켰다. 작품 초반에 하인리히 왕의 말도 독일 민족의 위기와 이에 대한 극복을 강조하고 있다. “독일 땅을 위해 독일 칼을 듭시다! 그러면 제국의 힘은 영원할 것이오!” 무엇보다 독일인의 가슴을 벅차게 했던 것은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이었다. 그는 위기에 처한 여주인공 엘자를 구해준다. 또한 백조로 변했던 엘자의 남동생 고트프리트를 원래대로 돌려줘 ‘순수한 독일 혈통’을 계승하도록 해준다. 로엔그린은 ‘적은 영원히 독일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예언자의 역할도 한다. 이동용 교수(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는 “독일의 승리에 대한 암시는 대중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바그너의 작품에는 이렇게 민족을 구원하는 ‘영웅’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바그너의 작품은 독일의 지도자들을 사로잡았다. 일찍이 루드비히 2세는 바그너가 10년간의 망명 생활동안 얻은 엄청난 빚을 모두 갚아줬고, 그의 공연에 특화된 바이로이트 극장까지 지어줬다. 열두살 소년 히틀러는 「로엔그린」을 처음 보고 감동해 자신도 민족의 영웅이 되고자 다짐했다. 바그너의 후기 작품에 깔려있는 반유대주의도 히틀러가 환영할 만한 요소였다. 그는 작품에서 유대인을 ‘난쟁이’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인물로 우스꽝스럽게 묘사했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오페라야말로 신이 축복한 음악이며, 이 작품을 통해 독일을 하나의 대제국으로 완성할 수 있다는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매해 나치전당대회 개막식이나 행진을 할 때 바그너의 작품을 연주하도록 했으며, 전쟁 중에도 바그너의 작품만을 공연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는 예산 지원을 계속했다.
 
물론 바그너가 히틀러가 태어나기 6년 전에 사망했고, 당시 반유대주의나 민족주의는 유럽 전체에 팽배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국민들의 머릿속에 게르만 우월주의를 세뇌시키기 위해 바그너의 음악을 적극 활용했으며,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에선 아직도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금기시된다. 한편 바그너를 히틀러와 관련시키기보단 음악적 완성도와 작품에 담긴 종교적, 철학적 함의에 집중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베르디와 함께 오페라 역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바그너, 이 둘의 살아온 인생이나 작품의 소재와 지향점은 분명 많이 다르다. 하지만 그들이 ‘시대와 호흡하는 오페라’를 만들었다는 점에선 접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오페라의 감동, 그 끝나지 않은 ‘대단원’
 
왜 우리는 수백 년도 전에 만들어진 오페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그 이유는 오페라가 다루는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과 삶에 대한 고민들이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민은기 교수는 “19세기에 쓰인 오페라라도 21세기의 우리가 감동을 느낀다면 그것은 ‘현대’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박윤경 교수는 “오페라에는 사랑, 이별 등 시대를 막론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고 전했다.
 
오페라를 현대적으로 변용해 명작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16세기 이탈리아 공작이 뉴욕의 마피아 두목으로 탈바꿈하기도 하고 「마술피리」가 베를린 도심 한복판의 지하철역에서 공연되기도 한다. 또 2004년에는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로버트 카슨에 의해 만들어진 「라 트라비아타」의 현대적 버전의 무대가 화제를 모았다. 매춘부인 비올레타가 주사를 맞는 장면이나 중세의 사교파티가 현대의 카바레로 재현된 장면은 19세기 베르디가 지적하던 문제들이 현재에도 지속됨을 보여줬다. 상류층의 위선과 이기주의에 희생되는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그너는 자신부터가 혁신적인 연출가였던 만큼 후대 연출가들도 다양한 각색을 시도하고 있다. 바그너의 손자인 빌란트 바그너는 무대 위에 빛과 등장인물을 제외한 일체의 소품들을 모두 제거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구체적인 시공간을 탈피함으로써 작품의 내용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 것이다. 한국바그너협회 임재인 총무는 “죽음을 통한 사랑의 쟁취, 인간에 대한 연민 등 바그너 작품에 녹아있는 가치와 이를 구현하는 음악은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에게도 설득력을 가진다”고 말했다.
 
참고 도서 : 「베르디 오페라 이탈리아를 노래하다」, 전수연, 책세상
「바그너의 혁명과 사랑」, 이동용, 이파르
「독재자의 노래」, 민은기 엮음,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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