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태훈 박사과정
국어국문학과

청춘을 위로한답시고, 혹은 힐링이니 공감이니 하면서 “괜찮다”, “힘내”라고 말하던 수많은 담론들에서 우리는 이제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는 듯하다. 내가 몇 번을 흔들리든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기도 하고, 멈추어도 당최 보이지 않는다고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거리의 확보는 곧 냉소주의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저 유명한 은희경의 『새의 선물에서 화자가 그랬듯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를 분리하는 시선이 그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을 잠시 빌려와 보자. 그에 따르면 주체를 대신해 하나의 대타자가 세계를 이해해주고 있다고 한다. 친절하게도 그는 개그 프로그램에서 나를 대신해 웃어주는 방청객을 떠올려 보라고 알려준다. 아, 그렇다. 우리는 사회의 ‘증상’들을 인터넷 기사로 접하고 댓글을 “호감순”으로 찾아 읽는다. 혹은 수천 건의 “좋아요”를 획득한 대타자의 인식을 통해 어떤 관점을 포착한다. 그러니까 나는 사회나 현실에 관해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 나를 둘러싼 대타자, 즉 이데올로기 혹은 시스템이 나를 대신해 작동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나 상처, 또는 의견에 공감을 표함으로써 주체의 지위를 유지한다. 그러나 매일 '휴먼 다큐멘터리 사랑'이나 '현장르포 동행' 같은 프로그램을 본다면 우리는 결코 일상을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이 일주일에 한 번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실제로 그 간극은 훨씬 길다). 이 순간적인 유대에서 우리는 삶의 절망을 목도하고 이를 통해 '위로'받기도 한다. 저기 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생각하며 말이다. 그 속에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 것을 나누어 줄 수는 없다는 이기심과 삶이라는 것은 결국 즐겁고 행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무)의식이 깔려 있다. 그러니 애초에 '공감'과 '위로'는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하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청부살인을 저지른 부유층이 다시 돈으로 법망을 피해가는 모습에 우리는 공분한다. 그리고 이를 공론화시켜 결국 그들을 법정에 세운다. 이러한 분노는 '실시간 검색어'라는 대타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나의 분노는 인터넷을 여는 순간 이미 발산되어 있다. 온갖 SNS가 나를 대신해 분노하고 성토를 시작한다. 거기에서 나의 자리는 없고, 나는 그저 분노를 '공유'할 뿐이다. 그리고 그 분노가 현실의 힘으로 작용해 윤리적 벌을 내리는 순간, 그래도 정의는 실현된다는 착각 속에 또 내 삶을 살아간다. 누구나 그렇다. 이 “누구나 그렇다”는 말은 판단을 내리고 실행에 옮긴 것이 내가 아니라 시스템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여기 무시무시한 21세기 사회는 냉소라는 구멍이 뚫려 있는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다. 다시 말해 이 세계는 시스템을 부정하는 어떤 측면도 이미 그 시스템 안에 가지고 있다. 그러니 우리의 이 고급스러운 냉소는 나도 모르게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고 있는 셈이다. 이 난경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것인가. 일단은 더 세련되게 비웃고 더 미친 듯이 잉여가 되자. “꿈꾸는 자 잡혀간다”(송경동)고 했지만 저들이 보기에 ‘아니, 저게 지금 꿈인가’ 헷갈릴 정도로 말이다. 요컨대 시스템의 오류나 고장의 가능성은 예측을 벗어나는 바이러스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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