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움베르토 에코, 『책의 우주』

▲ 삽화: 강동석 기자 tbag@snu.kr
▲ 김현호 사진평론가
(출판문화원)

책이란 무엇인가? 글자가 인쇄된 종이들의 한쪽 모서리를 묶어 놓은 물건이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은 종이로 만든 몸을 지닌 채로 우리와 함께 아주 오래 살았다. 그런 점에서 라디오나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 인터넷처럼 ‘새롭게’ 우리 삶에 들어온 것들과 책은 사뭇 다르다. 종이책은 쇠로 만든 숟가락이나 천으로 만든 옷처럼 항상 우리와 함께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종이책을 만들고 팔아서 먹고 사는 이들은 갑자기 불안에 떨게 되었다. 종이책은 과연 언제까지 이런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있어줄 수 있을까? 과연 언제까지 엄마들은 아기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무거운 가방을 멘 학생들은 언제까지 이렇게 낑낑대며 학교에 가고, 언제까지 학자들은 책을 빽빽하게 꽂은 연구실에서 뿌듯한 마음으로 서가를 바라볼까?

MIT미디어랩의 초대 소장이자 디지털 시대의 성격을 명쾌하게 정의했던 니콜라스 네그로폰테는 2010년 테크노미(Technomy) 컨퍼런스에서 물리적인 형태의 책은 5년 안에 ‘죽어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 음악을 듣던 행위를 생각해 보라. 그때는 음악도 CD나 테이프와 같은 물리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코닥은 절대 아닐 거라고 했지만, 카메라용 필름은 이제 거의 사라졌고 코닥은 파산했다. 네그로폰테는 종이책이 ‘완전히 죽어버리지는’ 않겠지만, 전자책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고 말 거라고 주장했다. 사실 그가 그 말을 했던 순간에도 이미 아마존에서는 킨들용 전자책이 하드커버 양장본보다는 더 많이 팔려나가고 있었다. 책 역시 ‘아톰에서 비트로’, 종이 묶음에서 디지털 파일로 순식간에 변해버리고 말까?

노자는 “천지는 어질지 않으니, 만물을 짚강아지처럼 여긴다”고 했다. 『책의 우주』에서 움베르토 에코와 대담을 나누는 작가 장클로드 카리에르도 “미래는 과거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갑자기 도래한 미래는 현재를 거칠게 움켜쥐어 과거의 풀무에 던져넣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툭툭 털며 천연덕스럽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것이다. 만약 종이책이 사라진다면, 그것을 만들기 위해 익히고 다듬었던 기술과 노동은 과연 어떻게 될까? 책 만드는 이들의 불안감은 자신이 마치 제사가 끝난 후의 짚강아지처럼 길에 버려지지 않을까 하는 데 있다. 천 년 이상 살아온 종이책이 사라진다면, 한 인간이 일이십 년 동안 익힌 기술 따위는 서까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을 것이다.

위기는 종종 사유를 낳는다. 아마 책의 위기가 아니었다면 책의 과거와 미래를 사색하는 책들이 요즈음처럼 활발하게 태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도 번역된 로버트 단턴이나 알베르토 망구엘, 사사키 아타루, 매리언 울프 등이 쓴 책들을 읽는 일이 부쩍 즐겁게 느껴진다. 이것은 책의 역사와 의미에 대한 그들의 사유가 깊고 풍요롭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위기가 주는 어떤 서늘함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 중에서도 움베르토 에코와 장클로드 카리에르의 대담을 엮은 『책의 우주』를 가장 즐겁게 읽었다. 여든을 넘긴 두 할배들의 입담은 황홀하고, 통찰력은 놀랍다. ‘지식의 티라노사우르스’라는 좀 코믹하지만 잘 어울리는 별명을 지닌 움베르토 에코는 고대와 중세, 근현대,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며 책과 인간이 관계맺는 역사를 종횡무진 읽어낸다. 작가 장클로드 카리에르 역시 에코 찜쪄먹을 입담과 지식을 지닌 할배다. 그들은 서로에게 로마 시대의 서점이나 중세의 책 장정가들, 19세기의 유사 과학과 책의 관계에 대해 거침없이 묻고 또 물 흐르듯이 대답한다. 각각 5만 권과 4만 권의 책을 지닌 장서가인 할배들은 죽은 다음에 자신들의 책을 어떻게 할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 서재에 불이 난다면 어떤 책을 향해 맨 먼저 달려갈 것인가, 당신이 가장 갖고 싶은 책은 무엇인가, 인간은 책을 왜 숭배하고 어떻게 불태웠는가, 어떤 책들이 남았고 어떤 책들이 사라졌는가, 남은 책들은 사라진 책들보다 우월한가. 인간의 지식과 기억이란 과연 무엇인가. 책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그들의 대담이 결국은 책이라는 존재가 지닌 특별함을 말하는 것으로 귀결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에코는 책은 마치 포크나 바퀴처럼 이미 완성된 것이며,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이 그토록 정념과 열정을 쏟았던, 그리고 우리의 ‘몸’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책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같은 전혀 다른 장치가 대체하리라 상상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단지 에코는 종이책이 사라진다면 ‘책과 비슷한 무언가’가 생겨날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나는 그의 이런 생각이 깊은 설득력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아이팟이나 아이튠즈는 CD플레이어나 워크맨의 물성을 흉내내지 않는다. 하지만 전자책 단말기나 아이북스 어플 등은 책의 물성이나 책장 넘기는 느낌을 모방하려 심혈을 기울인다. 이것은 천 년 동안 인간의 몸이 익숙해진, 책의 물성과 완성도가 지닌 위력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종이책이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가 가지게 될 새로운 ‘책’은 이전의 책과 많이 닮아 있을 것이다.

『책의 우주』의 오독과 몇몇 초점 잃은 비판은 불행히도 에코를 인터넷과 신기술을 혐오하는 늙은 테크노포비아로 몰아갔다.(괜히 루브르 박물관의 장서각 바닥에 킨들과 종이책을 던지는 퍼포먼스 같은 걸 했던 그의 자업자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지식의 티라노사우르스가 고작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새삼스럽게 말하자면 에코는 『푸코의 진자』를 썼던 이가 아닌가. 『책의 우주』에서 에코와 카리에르가 보여주는 책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통찰은 거듭 읽어볼 가치가 있다.

책이 겪었던 수많은 위기와 변화 중 지금이 가장 극적인 순간일까?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구텐베르크 혁명 이전과 이후에 있었던 종이책의 성격변화가 지금의 종이책과 전자책의 차이보다 훨씬 격심했을지도 모른다. 손으로 한 자 한 자 베껴 쓴 귀중품이었던 책은 산업세계 최초의 대량생산품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책의 이런 성격변화는 인간이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 역시 전자책이나 종이책의 최후 승자를 예측하려 전전긍긍하는 일이 아니라, 전자책과 종이책으로 인해 인간의 지식이 어떻게 바뀌어 나갈 것인가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일이 아닐까. 아마 책 만드는 이들의 탈출구 역시 이런 고민의 폭과 깊이로부터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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