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손미나 작가(전 아나운서)

고려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KBS 공채 아나운서 24기로 합격, ‘도전, 골든벨!’, ‘가족오락관’, ‘사랑의 리퀘스트’ 등을 진행하며 대한민국 간판 아나운서로 등극. 성공의 가도를 달리던 중 2004년 돌연히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유학, 한국에 돌아와 프리랜서로서의 삶을 선언하고 여행작가, 번역가로 활동. 끝없는 열정과 자유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손미나가 최근엔 장편 소설가로 데뷔했다. 인터뷰가 있던 날 신사동에서 팟캐스트 ‘손미나의 여행 사전’ 녹음을 마친 그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중에도“학보사 일을 하려면 바쁘겠네요”라며 오히려 기자를 걱정(?)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근처 카페로 이동한 우리는 나란히 과일쥬스를 주문하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 사진 제공: 손미나
◇대학생, 나 자신을 찾아라
Q.서울대생 중엔 대학에 들어와서 뚜렷한 목표가 사라지니 방황하는 경우가 많아요. 손미나 씨의 이력을 보면 대학생 때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실히 알았을 것 같은데요. 대학 시절의 손미나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A.“우리나라 여느 대학생과 비슷했겠죠?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열심히 주어진 공부만 해오다가 대학에 와서 엄청난 자유가 주어지잖아요. 갑자기 주어진 많은 시간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쓸 지 몰랐던 것 같아요. 혼란스러우면서도 설레는 기분으로 ‘이런 게 대학 생활의 재미인가…?’ 하고 사람들과 우루루 몰려다니던 시절이 있었죠. 그렇게 1학년을 정신없이 보내고 나니 ‘나 자신’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됐어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영자신문 스터디도 해보고, 사진 동아리도 기웃거려보고는 했죠. 그러다보니 외국어를 깊이 있게 공부해봐야겠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어학 공부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손미나는 스스로 비용을 마련해 호주와 스페인으로 교환학생을 떠난다. 모든 것이 한국과 달라 ‘새로운 별’에 떨어진 것 같았다는 그녀는 교환학생을 떠난 2년이 ‘진짜 나’를 찾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한국에 있을 땐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Q.주위를 보면 내가 무엇을 잘 할 수 있을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친구들이 많아요. 손미나 씨는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알 수 있었나요?
A.“저 자신에 대한 탐구를 정말 많이 했어요. 스페인에 가서 깨달은 게, 내가 말재주가 있더라구.”
 
Q.스페인에선 오히려 외국어가 서툴렀을 텐데요?
A.“그러니까 신기한 거죠. 한국에선 친구들이랑 원래 말하는 걸 좋아했으니까 몰랐어요. 그런데 스페인에 와서까지 내가 항상 대화를 주도해. 사람들이 다들 내 말만 듣고 있어요. 그리고 한국에선 겪어본 적 없었던 폭탄테러가 일어났을 때, 무섭기보단 얼른 현장에 나가서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거에요. 호기심이 많은 데다 대중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아나운서가 되자!’고 결심했죠.”
 
Q.그밖에 ‘나 자신’을 알기 위해 했던 노력들이 있나요?
A.“혼자서 생각도 했지만 친구들한테 많이 물어봤어요. ‘너희가 생각하는 내 장점이 뭐니?’ 라고요. 친구들이 제 장점으로 주로 꼽았던 것이 남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준다는 거였어요. 아나운서는 말을 하는 직업이지만 사실은 잘 ‘들어’ 줄 수 있어야 해요.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으면 그에 적절한 멘트를 칠 수 없거든.”
문득 지금까지 인터뷰한 사람들 중에 손미나 씨는 가장 내 말에 호응을 잘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맞장구를 치며 내 질문을 귀담아 들었고, 그에 대한 답변도 적절히 이루어져 ‘대화’를 하는 느낌이었다. 가끔은 아나운서 기질을 발휘하여 기자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해서 누가 누구를 인터뷰하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나를 찾아 여행을 떠나자
Q.서울대의 제 친구들 중에는 주변의 과도한 기대가 부담스럽고 남들이 인정하는 길을 벗어나기 두렵다는 친구들이 많아요. 손미나 씨는 아나운서로서 안정적인 기반을 버리고 유학길에 오를 때 주변의 반대나 불확실한 미래가 두렵진 않았나요?
A.“사회적인 압력이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렇지만 나는 주변의 시선에 신경쓰기보단 내 ‘영혼’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에요.”
 
그는 카페에서 주문했던 레몬 쥬스를 쥐며 말했다.
“아까 직원한테 과일 쥬스 종류를 물어보니까 ‘우리는 망고쥬스가 제일 잘 나갑니다’라고 말해서 레몬 쥬스를 못 시킬 뻔했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망고를 많이 먹으니까 망고쥬스를 마시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그런데 사실 레몬, 토마토, 바나나쥬스도 있었죠. 정 안되면 다른 가게에 가서 레몬 쥬스를 주문할 수도 있는 게 삶이거든요. 짧은 인생인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마저 할 수 없다면 너무 슬프지 않나요?”
 
유학 후 사표를 던진 손미나는 여행작가로 변신한다. 그는 일본, 아르헨티나 여행에세이를 집필하며 세계 곳곳을 누빈다. 그의 ‘현지밀착’ 여행기엔 솔직한 매력이 있다. 단편적인 여행지 소개를 넘어 그곳에 ‘거주’하면서 느낀 진짜 모습을 그려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선 탱고를 추며 도시의 화려함을 즐기기도 하고 치안이 불안정해 한밤중에 송아지용 트럭을 타고 도주해야 했던 어두운 단면도 함께 드러낸다. 이렇게 수박 겉핥기식 여행이 아니라 팔딱팔딱 숨쉬는 현장을 경험하는 것은 많은 대학생들의 꿈이기도 하다.
 
Q.대학생의 입장에선 외국에서 몇 개월씩 살아보고 싶어도 금전적인 문제가 따르는 것 같아요.
A.“그런데, 돈이 충분하다고 해도 어디론가 훌쩍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 알아요? 사람은 누구나 현재 가진 것보다 많은 걸 원하기 때문에, 이제 떠나도 되겠다 싶은 시점은 절대 오지 않아요. 오히려 많이 가지지 않은 학생일 때 떠나는 게 더 쉬울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무작정 떠나란 건 아니에요. 사람들은 내가 아나운서를 하다가 어느 날 기분이 내키는 대로 스페인에 간 줄 알지만 사실 난 정말 치밀하게 준비했었거든요.”
 
Q.그래서인지 손미나 씨의 글을 보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의 에피소드들이 생동감 있게 다가와요. 여행자가 아니라 마치 현지인이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여행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인물은 누구인가요?
A.“베르나르 베르베르처럼 유명한 사람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감동을 받은 적이 많아요. 제가 칠레의 푸에르트몬트를 여행할 때, 관광객을 말에 태우고 호수를 한 바퀴씩 돌며 살아가는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 분은 죽기 전에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젊은 시절부터 모은 돈으로 드디어 떠날 수 있게 되었을 때, 쌍둥이 딸들이 대학에 합격해버린 거에요. 할아버지에게 슬프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처음엔 슬펐지만 이젠 괜찮대요. ‘내가 세계로 굳이 가지 않더라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이 호수로 나를 찾아오니까’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도 뉴욕과 워싱턴이 너무 가고 싶었던 것이 마음에 자꾸 남더래요. 워낙 시골 사람이다 보니 뉴욕이랑 워싱턴이 상상 속에선 가장 번화한 도시인거야. 그런데 이젠 그 아쉬움마저 해결할 방법을 찾았대요. 뭐였을 것 같아요?”
 
도무지 감을 못 잡는 기자를 향해 그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뭐냐고 물었더니 아저씨가 갑자기 ‘뉴욕! 워싱턴!’ 하고 소리쳤어요. 뉴욕이랑 워싱턴이라는 강아지 두 마리가 자기 곁에 항상 있다며 웃는 거에요. 앞니가 다 빠진 정말 가난한 칠레 할아버지인데, 그 분을 아직도 있을 수가 없어요.”
 
◇나를 들여다보는 소설을 써라
손미나는 최근에 2009년부터 파리에 3년간 생활하며 쓴 장편 소설을 출판했다. 문예창작과를 나온 것도 아니고 소설을 쓰는 법을 배운 적도 없는 그녀였다.
 
Q.죽기 전에 한 번은 나만의 소설을 써봐라’고 말했는데 우리같이 평범한 대학생들도 소설을 쓸 수 있다는 말인가요?
A.“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소설이라는 장르는 에세이와 많이 달라요. 에세이는 생각을 풀어내는 데 그치지만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선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에 관심을 갖고 나 자신을 더 깊숙이 들여다봐야 하거든요. 힘든 과정이지만 완주했을 때의 기쁨과 성장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가슴 안에 소설을 안고 살아가요. 꼭 장편소설일 필요도 없고, 어딘가에 출판을 해라는 말도 아니에요. 인생에서 한 번 쯤은 내 영혼이 말하는 목소리를 마주해봤으면 좋겠어요.”
손미나는 3년 동안 파리에 살면서 소설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녀의 소설은 ‘파리지앵’의 문화와 철학을 익혀나가는 시간과 맞물려 있었다.
 
Q.창문 너머로 에펠탑이 보이는 집에서 소설을 쓰는 생활이 참 매력적으로 보여요. 사람들은 손미나 씨의 자유롭고 낭만적인 삶을 부러워하지만 이를 위해 포기해야 했던 것은 없었나요?
기자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던 손미나의 답변은 ‘생각해보지 않았다’였다.
A.“내가 어떤 것을 선택하기 위해 다른 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은데? 나는 한 번도 내가 한 선택 때문에 못하게 되는 일을 ‘포기’한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모든 걸 동시에 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행복하지도 않을 것 같아요.”
 
내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안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상관없다고 말하는 손미나. 그는 다음 스케쥴을 위해 이동해야 한다고 매니저가 재촉하자 승용차 앞까지 이동하며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성의를 보여주었다. 일분일초를 쪼개는 바쁜 삶을 살면서도 인터뷰 내내 그가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진정 내 ‘가슴’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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