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이예슬 기자 yiyeseul@snu.kr

스마트폰, 구글 글래스를 필두로 이제 각자가 다수의 컴퓨터에 일상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컴퓨팅’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렇다면 학술, 산업계의 구체적인 동향은 어떠한가? 그리고 신체 본연의 기능을 ‘본격적으로’ 디지털 매체에 양도하기 시작한 인간은 어떻게 변형될 것인가? 이번 특집에서는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지난 2월 구글사는 지금껏 볼 수 없던 형태의 컴퓨터를 출시했다. 착용자가 손을 전혀 쓰지 않아도 조작이 가능한 데다가 안경처럼 쓰는 형태인 ‘구글 글래스’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스마트폰을 필두로 다양한 형태로 실험되던 컴퓨팅 장치가 신체와 결합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정보가 인간의 포로가 돼, 굳이 사냥하지 않아도 정보가 제 발로 인간을 찾아오는 컴퓨팅 환경. 1988년 미국 팰로앨토 연구소에서 처음 제안된 ‘유비쿼터스 컴퓨팅(Ubiquitous Computing)’이란 개념이 오늘날 구체화되고 있다.

팰로앨토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던 마크 와이저는 유비쿼터스 컴퓨팅 개념을 “유선과 무선 그리고 근거리 무선 사이에 이음매 없는 통신망이 실현됨으로써 누구든지 어디서나 네트워크로부터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환경”으로 정의하며 동시에 이 개념이 오늘날의 매체 환경으로 도래할 것임을 예언했다. 즉, 이용자의 수보다 네트워크에 연결된 컴퓨터 장치의 수가 더 많으며 이용자의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지 가상현실에 접속할 수 있는 영화 같은 장면이 오늘날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이라는 휴대용 컴퓨팅 단말기의 보급을 통해 점점 실현돼 가는 마크 와이저의 예측대로 미시적으로는 인간의 지각 방식에서부터 크게는 사회상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많은 부분이 변화해가고 있다. 기술 발전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여러 화면으로부터 전달되는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는 능력이 발달되고 있으며, 시공간적 제약 없이 공동의 업무를 처리하는 ‘새로운’ 인간의 등장을 앞두고 있다. 이 현상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연구자들조차 향방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오늘날의 매체 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학계에서는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는 기술 상의 혁명적 변화를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을까?

미디어 학계에서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지각 변동의 맥을 잡기 위해 ‘재매개(remediation)’란 개념을 든다. 재매개란 인류 역사상 새로이 등장하는 미디어라 하더라도 결국 이미 존재하는 미디어의 형식을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뉴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계보학적으로 조망하는 이 개념은 제이 데이비드 볼터 교수와 리처드 그루신 교수(이상 미국 조지아공대 문학·커뮤니케이션·문화학과)가 제시한 일종의 ‘족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유비쿼터스 컴퓨팅이란 매체 환경 또한 “또 다른 미디어의 기술, 표현양식, 사회적 관습 등을 차용, 개선한 결과”라 말하며 유비쿼터스 컴퓨팅이 차지한 오늘날의 위치를 가늠한다.

소형화·착용화·지능화되는 컴퓨터

유비쿼터스 컴퓨팅은 ‘소형화된 컴퓨터’, ‘착용식 컴퓨터’ 그리고 ‘지능형 공간’으로 구분된다. 이 세 분야 중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영역은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소형화된 컴퓨터’일 것이다. 전화와 메시지를 주요 기능으로 삼던 휴대전화는 PDA라는 과도기를 거쳐 현재 컴퓨터의 구조를 갖추게 됐다. 컴퓨터에만 탑재되던 ‘폰 노이만 구조(메모리, 제어장치와 산술논리장치, 입출력 장치)’를 갖춘 스마트폰은 현재 한국에서는 70%에 가까운 보급률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스마트폰을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대표적인 산물이라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이유는 이용자가 휴대용 단말기를 통해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스마트폰은 마크 와이저가 말한 ‘유무선과 근거리 무선 사이에 이음매 없는 통신망’이란 조건을 오늘날 가장 광범위하게 충족시키고 있는 매체가 된다. 이런 변화를 일궈낸 장치의 소형화라는 경향성은 마크 와이저가 본래 예견한 것처럼 컴퓨터 장치가 완전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한편 ‘착용식 컴퓨터’는 말 그대로 ‘착용할 수 있는 컴퓨터’로 특정 신체의 기능을 보완해주며 네트워크에 대한 접근성을 강화시켜준다. 요즘 가장 주목받는 착용식 컴퓨터 장치가 바로 구글 글래스이다. 말 그대로 안경처럼 쓸 수 있는 이 단말기의 독특한 점은 스마트폰에 쓰인 것과 같은 소형 컴퓨팅 장치가 탑재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혼합 현실’의 형식으로 이용자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용자가 하늘을 바라볼 때 ‘오늘의 날씨’와 같은 정보가 이용자의 시야에 자동·수동적으로 개입한다. 이는 인간의 시각 정보를 처리해주는 차원을 넘어 그 기능을 아예 새로운 차원으로 전이시키는 것으로, 컴퓨팅 장치들이 신체의 본래 기능과 일체화되는 방향으로 상용화될 것임을 알려준다. 구글 글래스의 개발자 세르게이 브린은 “시선과 화면을 일치시킴으로써 스마트폰의 이용자가 환경으로부터 고립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은 ‘공간’으로까지 확장된다. 그곳에 있는 사람의 특정한 몸짓이나 음성으로 공간환경을 조작할 수 있는 시스템인 ‘지능형 공간’이 대표적인 예다. 이것이 거주공간에 적용된 사례가 바로 ‘지능형 주택’이다. 이는 요즘 아파트 광고에도 자주 소개되고 있듯이 거주자가 자연어 혹은 동작을 통해 주거 시스템을 조절할 수 있는 주거 공간이다. 특정 공간에서 손뼉을 치거나 자연어로 컴퓨터에 명령을 하면 사용자의 요구에 맞게 실내 온도가 조절되는 등 공간의 물리적 환경이 변화하는 것이다. 현재 거주 공간 위주로 구현된 이 지능형 공간 시스템은 유비쿼터스 컴퓨팅 환경이 발전할수록 주택을 벗어나 공공영역으로까지 그 규모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마크 와이저가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조건으로 소형화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인터페이스’를 들었다는 점에서 그의 예측에 가장 인접한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귀추

다만 유비쿼터스 컴퓨팅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무르익은 담론이 나오지 않았다. ‘미디어가 인간을 구성한다’는 마셜 맥루언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비쿼터스 컴퓨팅은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를테면 스마트폰의 경우 같은 시공간에 위치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서로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전혀 다른 소통 방식을 확산시키고 있다. 지리적으로 근접하지 않은 다수의 발화자들이 동시적인 대화와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또 구글 글래스와 같은 착용식 컴퓨터는 인간과 기계가 유기적으로 합체된 상태를 조성한다는 점에서 ‘미래형 사이보그’의 실현 가능성을 더욱 높였다.

학계에서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매체 환경의 변화가 워낙 속도와 규모 면에서 압도적이다보니 현상의 전체적인 상을 파악하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또 이재현 교수(언론정보학과)는 “매체 환경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실증적으로 규명하려고만 하는 시도는 기술결정론적 시각에 매몰되기 쉽다”며 현상을 맹목적으로 수집하려는 태도를 경계했다.

‘사이버 펑크’로 본 디스토피아적 미래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 사회가 전달할 이미지에 대한 단서를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이재현 교수는 “인간 생활의 변화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은 ‘사이버 펑크’ 계열의 예술 작품들을 참조하며 상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이버 펑크’란 과학의 초현대적인 발전과 이로 인한 문명의 극단적인 기계화,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를 주제로 하는 1980~90년대의 예술 양식이다.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가 그 시초라 알려져 있으며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또한 이 장르의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이버 펑크 장르의 예술 작품들은 디스토피아적 사회상을 전제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안전장치 없이 사회를 뒤덮은 컴퓨팅 환경이 좁게는 인간과 기계, 넓게는 실재와 가상 간의 정체성 혼란을 야기하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글 글래스를 쓴 사람은 자신의 시야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어디서나 존재하는 매체에 의해 굴절된 정보는 현실 그 자체를 바라보는 것을 저해할 수도 있다. 주체가 자신의 판단을 믿을 수 없는 딜레마. 그것이 사이버 펑크적 디스토피아의 정체다.

일률적으로 미래에 대해 비관하는 사이버 펑크 작품들은 오늘날이 ‘심리적 깊이 없이 모든 것이 표면적인 정보로 판단되는 사회’라는 쟝 보드리야르의 통찰과 만나며 현재를 날카로이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이 거울이 모든 기술적 발전을 미래의 해악으로 환원하는 단순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부분적인 데이터와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지금, 극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위 작품들의 이미지는 온통 장밋빛으로 물든 미래의 전망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과거의 충고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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