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경훈 교수
법학전문대학원

오랜만에 학생들 집회를 알리는 포스터를 보았다. 집회장소를 ‘아크로폴리스’라고 밝히면서 친절하게도 괄호 안에 ‘본부와 중앙도서관 사이 계단’이라는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아크로폴리스라는 말은 요즘 별로 안 쓰이기 때문에 잘 모르는 학생들도 있을 거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자주 쓰이던 교내 지명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다. 교수는 학교라는 세계의 일부만을 보고 다니는 것이라 함부로 판단할 수 없기는 하지만, 학생들과 얘기를 해 봐도 내가 학생시절에 사용하던 교내 지명은 대개 낯설어한다.

‘아크로’ 또는 ‘Acro’라고 줄여 부르던 아크로폴리스는 누구나 알고 있듯 수많은 집회가 열렸던 역사의 현장이다. 구호처럼 서너 음절 단위로 끊어서 말끝을 길게 늘이던 여러 연사들의 운동권 특유 말투를 ‘아크로 사투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구내서점 앞 층계참의 조그만 공간은 ‘열린마당’이라 불렀다. 큰 집회를 끝낸 후의 정리 모임 같은 것을 했었다.

꼭 집회와 관련된 것이 아니어도 교내 곳곳을 일컫는 이름들이 있었다. 없어진 곳들도 많다. 감골식당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감골’은 규장각 아래쪽과 옛 후생관 부근을 일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G1 게이트를 통해 들어오는 큰 길이 닦이기 전에는 운치 있는 녹지가 있었고, 거기에서 우리 동기들은 졸업사진을 찍었다. 지금 한창 예술동 공사를 하고 있는 ‘언덕방’에서 점심을 먹고 내려와 둘러 앉아 얘기를 나누던 ‘에덴동산’에는 진작에 농협건물이 들어섰다. ‘자하연’ 위로 놓여 있던 ‘오작교’는 처녀총각이 건너면 무너진다는 유치한 전설을 갖고 있었다. 대학동기 남녀 여럿이 졸업가운을 입고 올라 사진을 찍어도 끄떡없었다.

장소는 남아 있지만 이름은 별로 사용되지 않는 곳들도 있다. 법대 15동과 법학도서관 사이의 좁은 공간은 거창하게도 ‘정의의 광장’이라고 했다. 90년대 중반 이후론 ‘정광’이라 줄여 불렀다. 동숭동 캠퍼스에서 가져왔다는 정의의 종과 잘 생긴 목련이 여전히 서 있다. 92년 무렵이던가, 이곳에 주차를 하는 사례가 늘자 몇몇 학생들이 “정의의 광장인가, 주차의 광장인가”라는 대자보를 붙였던 기억이 난다. 학교의 협조로 차량출입을 차단하고 학생들의 공간이 되었다. 지금도 학생들로 북적이지만 굳이 ‘정의의 광장’이란 이름으로 부르는 것 같지는 않다. 법대의 ‘정의의 광장’처럼 사범대에는 ‘페다고지’, 공대에는 ‘붉은 광장’이 있었다.

중앙도서관 중앙통로 서편의 난간은 ‘빨랫줄’이라고 했다. 공부에 지친 학생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 모습이 빨랫줄에 앉은 참새를 닮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었지만, 빨랫줄에 후줄근하게 내걸린 빨래를 닮아 그렇다는 설이 우세했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1층 열람실은 ‘수족관’이라고 했는데, 이 이름은 본부 앞 ‘총장 잔디’와 함께 지금도 살아 있는 것 같다.

이런 이름들은 왜 덜 쓰이게 되었을까? 학생들이 어디에 모여 무엇을 하는 일이 적어진 까닭도 있을 것이고, 스마트폰과 휴대폰으로 그때그때 연락을 하다 보니 굳이 약속장소를 미리 정해 지칭할 필요가 없어진 까닭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아쉽다. 이름을 불렀기에 꽃이 되었다는 시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어떤 장소에 공동체 구성원들이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들이 공유하는 문화와 가치가 존재함을 의미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와 가치는 개개인 차원에서 빠지기 쉬운 조급한 이기심을 벗어나 조금 더 긴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빨랫줄’에서 고민을 나누던 친구들은 ‘중도 난간’에서 고민을 나누던 친구들보다는 조금 더 애틋하게 기억되지 않을까? ‘정의의 광장’에서 하는 토론은 그냥 ‘15동 앞’에서 하는 토론보다는 조금 더 진지한 가치를 추구하게 되지 않을까?

교내 곳곳의 정겨운 이름을 잊지 않고 또 새로운 이름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가는 것은 결국 그 공동체가 건강하게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작은 징표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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