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이 책] 『미셸 푸코와 현대성』

책이 안 팔리는 시대라지만 자기계발서는 꾸준히 팔리며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계발서를 통해 몇 시에 일어나고 무엇을 먹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등의 세세한 활동에서부터 도전정신과 배려 등의 인생관까지를 배우고 실천한다.

그런데 푸코의 시각에서 이런 자기 계발 행위는 자신을 더욱더 권력에 예속시키는 행위다. 우리가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스펙을 쌓고 좋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유지되는 것은 치열한 경쟁사회와 안정된 인구 수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 계발에 매진할수록 권력은 손쉽게 개인으로서의 주체를 관리할 수 있다. 푸코는 자기계발서가 유행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개인의 자발적 신체규율을 관리하는 권력을 ‘생명관리권력’으로 파악했다. 이런 문제의식과 함께 『미셸 푸코와 현대성』의 저자 오생근 명예교수(불어불문학과)는 푸코가 제시한 치열한 ‘현재성’을 돌아봐야 한다고 역설한다.

『감시와 처벌』의 번역자로 알려져 있는 오 교수는 30년 동안 푸코에 대해 쓴 논문들을 모아 이번 책을 출간했다. 여기서 오 교수는 미셸 푸코의 ‘현재성’을 ‘현실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현실을 위반하는 자유의 실천’으로 해석한다. 먼저 현실을 존중한다는 것은 푸코가 스스로를 철학자가 아닌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한 데서 잘 드러난다. 즉 영원과 형이상학적 주제를 다루기보단 ‘현재’와 ‘오늘’의 문제에 촉각을 세우고자 했다. 한편 현실을 위반한다는 것은 비판적 태도를 의미한다. 저자는 특히 이 비판적 태도를 강조하는데 “현실의 현재성을 중시하는 사람은 현실을 회의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며 “이때 비판은 ‘현실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다”이라고 말한다. 푸코의 현재성은 ‘지식인이 가져야 할 올바른 철학적 에토스’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것이 부재했을 때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은 소실될 수 있는 것이다.

‘현재성’을 가진 사람은 자기계발서의 유행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통제하고 관리하게 하려는 생명관리권력의 작용으로 파악하고 경계할 것이다. 생명관리권력은 원래 푸코가 ‘성(性)의 역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발견해낸 것이다. 푸코는 성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이 권력의 작용에 따라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밝힌다. 18세기 말부터 성에 대한 의학적인 담론들이 쏟아졌고 지식은 권력이 그물망처럼 퍼지는 데 일조했다. 성적 도착이나 동성애 등은 광기나 착란의 의학적 ‘증세’로 여겨졌고 특정한 성생활들은 ‘병리학적 진단’에 따라 관리됐다. 당시 사람들은 이 지식들을 바탕으로 성생활을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통제해갔다. 푸코는 이 과정을 18세기 말부터 인구 증가나 출산율, 건강, 위생 등의 영역을 통제하고자 했던 생명관리권력의 작용으로 생각했다. 생명관리권력은 인구 통제와 신체 규율의 차원에서 생산적인 성생활을 장려했고 ‘비정상’ 혹은 ‘불건전’한 성은 배제하려 했던 것이다.

푸코의 이런 분석은 당대 지식계의 주류였던 맑스주의와 대비되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오 교수는 푸코와 바타유, 칸트 등 다른 사상가들과의 비교를 진행했는데, 그 중에서도 맑스주의에 대한 푸코의 평가를 강조한다.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효율적인 노동력 착취를 위해 성생활을 억압하고 규제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푸코는 특정한 이론의 사고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새로운 논의를 전개했다. 저자는 특히 『말과 사물』에서 푸코의 맑스주의에 대한 견해를 강조한다. 오 교수는 푸코가 “19세기의 사유에서 맑스주의는 물을 만난 물고기와 같다. 다시 말해 맑스주의는 다른 곳에 가서는 어디에서건 숨을 쉬지 못한다”고 강도높게 비판한 사실을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맑스는 리카도 경제학이 제시한 잉여가치 개념을 차용했으며 ‘인식론적 단절’을 이루지 못했기에 독자적으로 미래를 열어갈 수 없는 것이었다.

권력의 작용을 포착하기 위해 푸코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개념이나 상식들이 실상 우리를 예속하는 권력의 작용이라는 것을 파악하려 했다. 이를테면 죄수가 감옥에 가는 것은 모든 시대의 상식이 아니었으며 형벌제도가 합리적으로 발전해온 결과도 아니었다. 18세기 말에야 정착된 감옥은 죄수의 인권을 우대한 인간적인 제도가 아니라 “권력의 기술 변화에 따른 결과일 뿐”이었다. 근대의 감옥은 죄수의 육체 대신 영혼을 통제하며 ‘규율’에 맞는 인간을 제조했다. 죄수들은 군주가 아닌 보이지 않는 ‘판옵티콘’의 묵계에 따라 스스로를 규율하며, 이는 감옥 밖의 시민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때 권력은 그물망처럼 개개인들의 의지에 퍼져 있으며,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제도를 내면화하면서 ‘자신을 예속시키는 권력’에 포섭됐던 것이다.

푸코의 회의주의적 통찰을 통해 살펴본 인간은 권력에 의해 인식론적인 자유가 박탈돼 있으며 주체적인 의지를 가질 수 없는 ‘비인간적’, 혹은 ‘죽은’ 존재로 보인다. 때문에 자칫 푸코는 허무주의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자기계발이 의미하는 권력작용을 알았다면 자기계발을 중단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는걸까. 이에 대해 저자는 “그의 회의주의를 허무주의가 아닌 ‘다르게 생각하기’로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즉 푸코는 자명한 이념들을 다르게 생각함으로써 이전엔 보이지 않았던 현실의 한계를 직시함과 동시에 우리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 또한 명징히 밝힌 것이다. 푸코의 위반은 한계에 부딪혀 돌아오는 것이 아닌 그 지점에 멈춰서 다음을 바라보는 작업이다. 저자가 “우리가 미래의 주인이 되고 싶다면 기본적으로 오늘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결국 자유롭고 주체적인 내일을 만들기 위한 의지의 표출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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