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강동석 기자 tbag@snu.kr

 만화 「신의 물방울」은 한국에서 와인 열풍을 이끌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만화의 하이라이트는 등장인물이 와인을 마시고 나서 감상을 말할 때다. 누군가는 숲속에서 산책하는 소녀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재즈가 흐르는 술집의 멋쟁이 신사를 떠올린다. 고작해야 달다, 쓰다, 맛있다 정도로만 느낌을 표현하던 사람들에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환상적인 이야기를 뽑아내는 그들의 재능에 감탄하다보면 어느새 저도 모르게 와인이 마시고 싶어진다. 허풍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는 비평도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하지만 대상을 좀 더 음미하게 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풍부하고 다채로운 의미 부여를 가능케 한다면, 주관적 감상을 나쁘게 볼 필요는 없으리라.

그런 상상력이 예술의 영역이 아니라 현실에 적용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지난 5일, 정부는 총선에서 10%의 지지를 받은 정당에 대해 해산심판을 청구했다.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이례적 결정이었다. 정부는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단어에서 김일성을 떠올리고, ‘민중’이라는 단어에서 사회주의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러한 말들을 근거로, 통진당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기발한 상상력 앞에서, 언어는 최소한의 객관성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불행히도, 문제는 소통의 부재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꾸준히 민주주의의 제도적 발전을 이룩해왔다. 권력의 획득과 행사에서 법적·절차적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 즉 헌법은 권력에 우선한다는 것이 기본 원리로 자리 잡았다. 이제 누가 지도자가 될지라도,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은 굳건히 유지되리라 여겨졌다. 얼마 전까지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라는 말도 들려온다. 그들은 국민의 자격을 심사해야 한다고, 자격 여하에 따라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이러한 말들이 허풍이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하나씩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에게 ‘한 마리 해충’으로 비유되던 교사들의 노동조합은 합법화된 지 14년만에 다시 법적 지위를 박탈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노동부의 시행령만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 3권이 간단하게 사라지고 만다.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기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그렇게 권력은 ‘비국민’을 공격한다.

맘에 안 드는 대상을 찍어 싸움을 건다. 이기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한 번 찍은 대상은 확실히 짓밟는다. 우리 편이면 무슨 짓을 해도 용인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좀 논다는 양아치들의 행동 패턴이었다. 그렇게 몇 명 손봐주면 어느새 반 아이들 대부분은 알아서 순응했다.

전 정부는 공적 영역을 활용해서 사적 이윤을 취하는 먹튀의 세계였다. 국가 예산을 낭비하고 공적 자산을 민영화하며, 그 속에서 경제적 이득을 챙겼다. 돈벌이가 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대한민국의 경제적 골간을 무너뜨렸다. 현 정부는 공적 기구를 활용해서 사적 권력을 탐한다. 다른 구성원의 헌법적 권리를 자의적으로 제한하면서, 반대로 그 자신의 권력은 헌법적 한계를 초월한다. 힘 센 자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대한민국의 정치적 골간을 무너뜨리고 있다.

40년이 훌쩍 지났건만, 대한민국은 어쩌면 그 때 그 시절 시바스 리갈의 아늑한 향에 여전히 취해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었는지, 이미 전태일을 통해 알고 있다. 얼마 전 한살박이 딸아이를 둔 노동자가 전태일과 똑같은 길을 택했다. 이미 반복 학습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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