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준혜 강사
중어중문학과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두고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세대”라고 표현한 글을 보았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수고하는 우리에게 너무 지나친 평가가 아닌가! 그러나 돌이켜보니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다. 모든 기준이 ‘나’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남’과의 비교에서 시작되는 것. 만족이나 성취감이 남과의 비교 우위에서 얻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채울 수 없는 항아리가 될 것이다. 숲 속에 있을 때는 눈앞의 나무만 보일 뿐이니, 눈을 돌려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며 ‘나’의 기준을 세워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공자의 제자 중에 증자(曾子)라는 인물이 있는데, 공자는 그를 “노둔(魯鈍)하다”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노둔하다’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뜻으로 썩 긍정적인 평으로 보이지 않는다. 증자의 이런 성품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날 증자의 처가 시장에 가려는데, 아들이 울면서 따라나섰다. 증자의 처는 시장에서 돌아오는 대로 돼지를 잡아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아이를 돌려보내는 데 성공한다. 육식을 즐기는 오늘날에도 돼지를 잡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아이가 그날따라 심하게 떼를 썼거나, 아니면 증자의 처가 본래 통이 좀 컸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녀는 위기를 모면하고 싶었을 뿐 아이에게 돼지를 잡아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돼지를 잡는 증자를 보고 크게 당황하며 그저 아이를 놀린 것뿐이라고 해명한다. 그러자 증자는 “아이는 장난을 칠 대상이 아니며, 아이에게 약속을 한 뒤에 지키지 않는 것은 아이에게 속임수를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嬰兒非與戱也. 今子欺之, 是敎子欺也)”라고 말하고 결국 돼지를 잡는다. 공자의 “노둔하다”라는 평가가 다소 이해되는 사건이다. 옆에서 공자를 모신 제자도 많았고, 능력과 자질 면에서 더 훌륭하다고 평가 받은 제자도 여럿 있었지만, 공자의 가르침을 후세에 전달한 제자로 증자가 첫손에 꼽힌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중국 한(漢)나라 시대의 장수 한신(韓信)은 젊은 시절에 빨래하는 아낙에게 밥을 빌어먹을 정도로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어느날 한신은 백정 마을의 어린 소년으로부터 자기의 사타구니 아래로 지나가라는 모욕적인 요구를 받는다. 이 대목을 『십팔사략(十八史略)』이라는 역사서에서는 “한신이 한참 동안 그 아이를 쳐다보다가 몸을 굽혀 다리 사이로 기어가니, 시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한신을 겁쟁이라고 비웃었다(信熟視之, 俛出胯下蒲伏, 一市人皆笑信怯)”라고 기록했는데,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숙(熟)’ 한 글자를 통해 한신의 내면적 갈등이 절절히 전해진다. 본래 ‘熟’은 ‘(과일 등이) 익다’의 뜻인데, 그만한 느낌의 시간 동안 그 아이를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생각이 교차했을까? 그러나 참기로 결정하고 모욕의 순간을 이겨내어 마침내 한나라의 장수가 되었으니, 그의 참음을 보며 나 또한 배우는 바가 있다.

『논어』에서는 사람을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 “배워서 아는 사람(學而知之)”, “곤란해져서 배우는 사람(困而學之)”, “곤란해도 배우지 않는 사람(困而不學)”으로 구분했다. 이 글을 대할 때마다 “困而學之”에 해당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지다가도, “안다는 측면에서 보면 모두 하나이다(及其知之, 一也)”라는 『중용(中庸)』의 문장에서 심심한 위로와 함께 다양한 평가의 가능성을 배우게 된다.

이상은 학생들과 한문을 읽으며 공감했던 부분을 적어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사례와 사유의 기록인 한문 읽기를 통해 인간과 인생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찾아 지켜가며 더 이상 배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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