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아나운서가 열애설을 부인하기 위해 올린 트위터 내용이 화제가 되었다. “나라가 이꼴인데 무슨 연애…”라며 뜬금없이 시국 선언을 한 것이다. 본인은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겠지만 이 말은 화제가 되며 네티즌들의 패러디를 낳았다. 나라가 이꼴인데 무슨 공부냐고 자조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나라가 이꼴인데 연애하는 자신은 ‘무개념’이냐며 반발하는 이도 있었다. 그렇다면 결론이야 어찌 됐든 ‘나라가 이꼴인데’라는 과격한 전제에는 다들 동의하고 있는 것일까.

▲ 삽화: 강동석 기자 tbag@snu.kr

하지만 나라가 이꼴이어도 연애는 해야지 어쩌겠는가. 연애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연애가 나라꼴에 따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수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 드라마를 통해 증명된 바 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응답하라 1994」에서도 서사의 중심은 연애이다. 이 드라마는 고등학생들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응답하라 1997」의 후속작으로, 90년대 중반을 살아갔던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대학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고등학생들을 주인공으로 다룰 때는 연애 서사를 중심으로 당시 분위기를 보여주는 디테일한 소품과 굵직한 사건 몇 개를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드라마가 꾸려졌다. 하지만 대학생이 주인공이 되자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배경으로 하고 있는 1994년의 대학생활은 과연 어땠을까? 이 드라마에서 과거 자신들의 모습을 중첩시켜가며 보는 94학번 언저리의 사람들은 대체로 당시를 민주화된 사회라고 자부하면서도 대학생의 사회참여에 대한 최루탄 진압과 임의 체포가 여전히 남아있었던 혼란기로 보는 듯하다. 이 당시 대학생 문화는 학과 학생회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여기서 학과 학생회는 당연히 ‘운동권’에 연계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 당선으로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뤄진 후 소위 ‘X세대’라 불리게 된 대학생들의 개인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과방에는 대중가요와 민중가요가 애매하게 공존했다고 한다. 락카페를 순회하다가도 과방에 들러서는 우루과이라운드로 인한 쌀 개방 문제에 대해 한 마디 듣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당시 대학생 사회의 애매한 혼란이 드라마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그들은 삐삐를 치고 PC통신을 하고 마하쎄븐을 마시고 『슬램덩크』를 읽으며 연애에 몰두할 뿐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드라마를 왜 다큐로 받아들이느냐는 이들도 있다. 재밌으면 됐지, 드라마에 뭘 더 바라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온갖 소품과 대중가요를 가지고 당시 시대상을 고증하려는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왜 당대 대학 문화에서 결코 없었던 척 할 수 없는 학과/학생회 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의 리얼리티는 소품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1994년도를 응답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그 당시의 ‘현실’이 어떠했는가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려는 편협한 태도를 통해서 재현되는 것은 무책임일 뿐이다. 레비나스는 응답을 책임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한 바 있다. 타인의 호소에 응답(respond)하는 귀를 가진 이들은 ‘책임’, 그러니까 응답가능성(respons-ibility)의 능력과도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가 이꼴이어도 연애는 해야 하듯, 연애는 하더라도 ‘나라가 이꼴’인 데 대한 책임은 같이 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훗날 당신도 ‘응답하라 2013’을 당당히 외칠 수 있지 않겠는가.

안지영 간사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