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서머셋 모옴의 소설 『과자와 맥주』를 책장 한 귀퉁이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은 지난 봄의 일이었다. 눕혀져 있던 이 책을 무심결에 집어 들면서 친숙한 제목을 금방 알아보았지만, 머릿속에 아무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사놓기는 했지만 읽지는 않은 책이라고 일순 생각했지만,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군데군데 밑줄이 그어져 있고 모르는 단어에는 강세의 위치 또한 표시해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책갈피 사이에 반으로 접힌 종이가 끼워져 있어서 펼쳐보니 이 소설과 관련된 일련의 질문들이 있었다. 1인칭 설화자인 애쉰덴이 믿을 만한 인물인가? 로지라는 인물의 묘사가 설득력이 있는가? 소설 전체의 플롯이 과연 만족스러운가? (이 대목에서 참았던 웃음이 피식 나오고 말았다.) 성격이 변화하는 인물이 있는가? 내 딴에는 혼자서 공부를 좀 해보겠다고 소설 수업에서 접하던 질문들을 어수룩하게 흉내 내고 있었다. A4용지의 반 정도 되는 종이에 수동식 타자기로--그러니까 학부시절이었음이 분명하다--내 자신이 쏟아낸 이 질문들에 대해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소설의 내용 자체가 아예 생각나지 않는데 무슨 수로 답할 것인가.

『과자와 맥주』가 안겨준 당혹감은 모옴이라는 작가와 나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모옴은 포우와 함께 내가 학부시절에 수업과는 무관하게 혼자서 읽었던, 그러니까 좋아서 무턱대고 읽었던 몇 안 되는 작가들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나라가 아직 베른협약에 가입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외국서적들이 허름한 해적판으로 나돌던 시기였는데, 나는 바로 그런 해적판으로 모옴의 『달과 6펜스』나 『인간의 굴레』와 같은 소설들을 읽었다. 학부 2학년 여름에는 영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친척에게 모옴의 단편집을 구해달라고 부탁했고, 가을학기가 시작하기 직전에 서너 권의 모옴 단편집과 함께 『과자와 맥주』도 내 책장 한켠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시절에 나는 사전과 씨름해가며 때로는 흥미롭게, 때로는 이상한 의무감에서 그냥 꾸역꾸역 모옴의 작품을 하나씩 읽어나갔는데, 『과자와 맥주』에 대해 아무런 기억이 없는 것은 자발적으로 읽기는 했어도 큰 감흥 없이, 그야말로 ‘꾸역꾸역’ 읽어나갔기 때문이리라.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라면 전체를 기억하지는 못해도 인상적인 인물이나 대목이 머리에 남아 있기 마련인데, 가령 화가가 되겠다고 느닷없이 가족을 내팽개치고 파리로 떠나는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처자식과 함께 멀쩡하게 살다가 갑자기 예술적 광기를 뿜어내는 이 중년의 사나이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인간의 굴레』의 주인공은 내가 읽은 소설의 그 어떤 주인공보다 더 짙은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데 아마도 그가 다리를 저는 고아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그러나 주인공에게로 향하는 작가의 시선에서는 연민이나 동정을 감지하기 힘든데, 자전적인 작품임을 감안하면 작가의 절제가 특히나 돋보인다.) 매춘부를 회개시키려다 그녀의 육체에 굴복한 후 면도칼로 자결하는 선교사의 이야기(「비」), 남편에게 살해당하는 꿈을 꾸었다는 어느 여인을 과연 현실에서 그 남편이 정말 죽인 것인지 사실과 허구가 구별하기 힘들게 섞여 있는 러시아인의 이야기(「꿈」)도 기억에 생생하다. 모옴의 단편소설은 언제나 최소한도의 재미를 보장해준다는 것이 학부시절의 어렴풋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대학원에 진학할 무렵부터 ‘재미있는’ 작가 모옴은 ‘중요한’ 작가들에게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학부시절에는 비록 수업에서 접할 수는 없어도 여유가 있을 때 그냥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었지만, 석사과정에 진학하니 사정이 달라졌던 것이다. 대학원에서의 공부는 감당하기 힘든 독서량을 요구했고, 이는 헤밍웨이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것과 같은, 깨끗하고 조명이 밝은 카페를 학교 근처에서 찾아본다거나 (그런 곳이 있을 리 만무했는데, “조명이 밝은 카페”란 당시에는 일종의 형용모순이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방을 어두침침하게 해놓고서 포우의 탐정소설을 읽어보는 호사스러움과의 작별을 의미했다. 수업, 과제, 시험, 그리고 논문 작성 때문에 입맛대로 독서를 하기란 불가능했다. 학부생은 시간이 날 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읽으면 되지만, 대학원생은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도서목록을 괴롭게 따라가게 된다는 어느 대학원 선배의 말은 진실이었다. 이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박사과정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여서 모옴의 작품을 마음 편하게 읽을 여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유학시절의 수업에서도 모옴의 작품과 접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사석에서 이 작가를 언급하는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모옴과의 소원해진 관계가 박사학위 취득에 적어도 지장을 준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시간이 흘러 강단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도 모옴이 뒷전에 물러나 있다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었다. 가령 영문학의 정전을 대변하는 『노튼영문학선집』이나 『롱맨영문학선집』에 모옴이 실려 있지 않으며, 몸담고 있는 학과의 교과과정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교수도 대학원생처럼 수업, 과제, 시험, 그리고 논문 작성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옛 정(?)을 생각해서 나의 강의계획서에 모옴의 단편소설을 포함시키면 어떨지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령 <현대영국문학개관>을 가르칠 때 인간 본성의 어두운--종종 저열하거나 불가해한--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모옴의 단편소설을 하디 뒤에 배치하면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어도 대충 자연주의의 흐름을 이어나갈 수는 있으리라고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모옴 앞뒤에 배치될 다른 작가들을 떠올린다면 그가 아무래도 왜소해 보인다. 모옴의 생몰연대(1876-1965)를 보면 그가 <현대영국문학개관>에서 다루게 되어 있는 모더니스트들과 동시대인임을 확인할 수 있지만, 항상 시간에 쫓기는 개관 수업에서 콘래드나 울프, 로런스, 조이스, 엘리엇 등과 같은 주요 모더니스트들 사이에 모옴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모옴을 개관 수업에서 다루는 것은 아무래도 개인적 취향의 과도한 반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당분간 모옴과의 관계를 제대로 복원하기는 어렵겠지만, 어쩌다 손에 잡힌 그의 작품을 나는 여전히 반갑게 펼쳐볼 것이다. 지금 어느 구석에서 먼지를 모으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혹시나 『써밍업』을 발견한다면 파리의 서점에서 그가 저지른 악행에 대하여 쓴 부분부터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 비싸서 살 수 없었던 모파상의 소설을 읽다가 점원들이 보지 않을 때 한 페이지를--아마도 마음에 드는 부분을--잘라낸 후 계속해서 그 책을 읽었다고 서술하는 그 대목에서 모옴은 자신의 못된 짓이 그저 인간이 화장실을 드나드는 정도의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서술하고 있다. 『고백록』에서 루소가 보란 듯이 자신의 죄를 증폭시켜 고백하면서 자아의 팽창을 즐기는 것과는 달리 모옴은 고백을 통하여 자아의 중요성을 부풀리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이는 자기가 파악하고 있는 일반적인 인간의 범주에 모옴 자신도 당연히 속한다고 보기 때문일 터인데, 종종 곤혹스럽기는 해도 인간에 대한 이런 가감 없는 시선에 나는 끌리는 것이리라.

봉준수 교수(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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