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음 단계로
이제, 다음 단계로
  • 대학신문사
  • 승인 2014.02.22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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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문을 나서며] 정하늬(국어국문학과·박사졸업)
▲ 정하늬
국어국문학과·박사졸업
‘드디어’ 졸업을 한다. 박사 2005학번이니까, 거의 10년이 걸린 셈이다. 얼마 전 도서관 제출을 위해 갓 제본된 논문을 받아들었는데, 금박으로 된 ‘2014’란 숫자를 보면서, 오래 걸렸구나 싶었다. 오래 묵을수록 좋은 음식이 있듯이 학위도 그런 것이라면 좋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위로를 삼았지만 말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잘 다니던 회사를 멋지게(?) 그만 두고 대학원 입학을 준비했다. 나는 소위 말하는 ‘IMF 세대’여서 졸업 후 바로 취직한 것도 참 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월급 꼬박꼬박 나오는 회사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인 공부를 한다고 하니 주위에서는 다들 말렸다. 10년 안에 졸업하겠노라고 큰 소리를 쳤지만, 현실은 이상과는 달랐다.
 
‘좋아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은 엄연히 달랐다. 좋아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며 잘하는 일이라면 더없이 행복하겠지만, 나는 그렇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일이지만 그것을 썩 잘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입학 후에는 계속 좌절과 열등감에 시달렸다. 아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대학원 생활을 과연 ‘즐겼다’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힘들다고 투정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게 왜 직장은 그만두었을까, 후회도 됐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은 역시 행복한 일일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졸업을 앞둔 지금도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상태이지만 말이다.
 
내 상황에 지쳐갈 때 즈음 지식채널e에 김연수가 쓴「마라톤을 완주하는 방법」이라는 에피소드를 보았다. 마라톤이란 것이 산술적으로는 천 미터를 42번만 달리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이 개입되면 달라진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1천 미터 씩 35번쯤 달리면 누구나 벽을 만납니다. 처음 나간 대회에서 저도 그 벽을 만났습니다. 온 우주가 저 하나 완주하는 걸 막기 위해서 밀어대는 느낌이더군요. 야속했어요. 저 하나 완주하는 걸 막기 위해서, 온 우주씩이나 나서다니. 포기할 수밖에요. 그 다음 몇 달 동안, 다른 선수들은 어떻게 그 벽을 통과하는지 살펴봤습니다. 아무리 봐도 방법은 단 하나뿐이더군요. 그냥 뚫고 지나가는 것. 그게 제일 현실적인 해결책입니다. 지나간 뒤에야 저는 애당초 그런 벽이 없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면서, 이 글처럼 온 우주씩이나 나서 내 앞에 벽을 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 에피소드를 보면서 얼마나 공감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때 내게는 벽을 뚫고 지나가라는 말, 멈추지 말고 계속 달리라는 말도 남의 이야기였다. 심지어 6살 난 딸아이는, “엄마처럼 매일 늦게까지” 공부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박사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결연하게 말했다. 내가 힘들어 한 것이 아이에게도 보였구나, 나는 학자에 대한 좋은 모델도 되지 못하는구나 하는 자책도 했다.
 
그러던 중, 논문 심사본을 드리러 심사위원 선생님을 뵈러 갔을 때, 한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즘 청년들은 투명한 현재를 보기보다는 불투명한 미래에 얽매여 있다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매일매일 한다면, 불투명한 미래 따위는 겁낼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면서, 난 매일 벽과 마주했고 그 벽을 뚫으면 또 다음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오락처럼 벽 하나를 깨면 다음 단계로 또 다음 단계로 ‘stage clear’를 반복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돌아보니 이번 판은 참 어려웠고 공력도 많이 필요로 하는 단계였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이번 판도 ‘clear’했고, 이제 다음 단계를 열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무적(無籍)’ 상태로 다음 판을 준비 중이지만, ‘투명한 현재’에 집중하면 다음 판도 그 다음 판도 그 벽을 뚫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길고, 십수 년쯤이야 긴 인생에서는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일 것이다. 이번 판이 힘들었다고 다음 판도 힘들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교문을 나서며, 나는 다음 판으로 이동한다. 부디 좋은 점수로 이기고 넘어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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