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일 교수
지리교육과

대학에 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캠퍼스 이곳저곳에 다듬어지지 않은 몰골을 한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배회하는 것을 보면, “아 이제 정말 봄이 왔구나”라고 느낍니다.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생각나는 몇 가지 얘기를 해드리려 합니다.

첫째, “서울대학교를 진정으로 사랑합시다.” 서울대학교는 한국 사회에서 많은, 무거운 의미를 갖습니다. 어떤 것들은 매우 긍정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어떤 것들은 매우 부정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국가와 민족의 미래가 서울대학교에 달려 있다고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학벌 사회의 주범이며 특권의 상징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의미에 앞서 가장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는 ‘우리 학교’라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 초등학교를, 우리 중학교를, 우리 고등학교를 아무런 사심 없이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 대학교인 서울대학교를 사랑하기 바랍니다. 왜곡되지 않은 애교심은 성공적인 학교 생활의 기본입니다. 도서관의 책들, 교정의 꽃과 나무, 과의 교우들에게 살가운 정을 붙여 봅시다. 그리고도 남는 정이 있으면 강의실의 우리 교수들에게도 조금 나누어 줍시다. Go, SNU!

둘째, “‘열등감’은 ‘자만심’보다 훨씬 더 나쁜 감정입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열등감’을 얘기하는 게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오히려 ‘자만심’을 의심하고 그것의 폐해를 이야기 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학생들에게는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잘난 체하지 마세요.” 그러나 저는 열등감 얘기를 기어코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소수가 갖고 있다 하더라도 열등감(혹은 넓은 의미의 콤플렉스)이 훨씬 더 어렵고 치유하기 어려운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힐링캠프라는 방송이 있지요. 작년에 유명한 소설가가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그 소설가는 어릴 적 가정불화가 잉태한 열등감으로 인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학가가 된 지금도 종종 끝없는 절망감의 나락으로 빠져든다는 고백을 합니다. 방송을 보면서 조금 울었습니다. 똑같은 경우는 아니었지만 저는 그 소설가의 그 감정이 너무나 잘 느껴졌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매우 다양한 종류의 열등감의 근원들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입생 여러분들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겠지요.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가장 중요한 시작점은 열등감의 근원을 인정하고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열등감의 근원을 감추고 그것에 뭔가를 덧씌우려 들면 들수록 열등감은 독버섯처럼 자라나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합니다. 결국 열등감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우리의 인생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신입생 여러분들께 얘기하고 싶습니다. 조용히 앉아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혹시 있을 열등감의 근원을 찾아봅시다. 혹시 있다면, 앞으로의 대학 4년을 그 근원을 없애는데 할애하여도 전혀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 “‘사랑’은 부모의 몫이고, ‘이해’는 자식의 몫입니다.” 아마도 많은 신입생들은 부모님과 지금까지도 잘 지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많은 학생들은 현재 갈등을 빚고 있거나, 앞으로 갈등을 빚을 것입니다. 이것은 대학 시절뿐만 아니라 이후의 긴 시간 동안 커다란 인생의 숙제로 남을지도 모르는 매우 중대한 사안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깊은 사랑으로 옳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을 자식은 도통 들으려하지 않고,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는 자신들의 생각만을 완고하게 강요할 뿐 이해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이 갈등은 특정한 사안을 앞에 놓고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격화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지 못했고 지금도 잘 하지 못하지만 부모와 갈등을 겪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여 제안해 봅니다. 부모가 되어 본 사람은 모두 압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자식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깊은 사랑이지요. 사랑은 아래로만 흐릅니다. 그런데 부모의 자식에 대한 ‘이해력’은 그들의 ‘사랑력’에 비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빈약합니다. 신은 부모에게 자식을 사랑할 능력만 주고 이해할 능력은 주지 않았나 봅니다. 이해는 이해되지 않는 것을 애정을 바탕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부모의 숭고한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그 보답의 핵심에는 부모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입니다. 이해는 위로만 흐릅니다.

앞의 세 가지는 제가 대학 시절 하나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부디 신입생 여러분들은 우리 SNU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열등감의 침전물 없이, 사랑과 이해를 부모와 맞교환하는, 그런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