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은 해 본 적이 없다만 졸업은 분명 유쾌한 무언가일 것이다. 졸업하는 친구들이 함박웃음을 지은 채 기념 사진을 찍는 동안 졸업에 실패(!)한 누구는 도서관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졸업을 새로운 시작으로 비유하는 관행은 이 같은 졸업의 유쾌한 성격을 더욱 부각시키곤 한다. 아마 많은 졸업생들이 희망에 부푼 상태로 학교를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씁쓸한 뒷맛을 남긴 채 작별을 맞이해야 했던 이들이 있다.

지난 호 『대학신문』에는 교지 「관악」의 종간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1990년 창간호를 발간한 이래 꾸준히 ‘시대의 눈동자’를 자처해 온 바 있는 교지 「관악」은 지원률 감소로 인해 인력난을 겪어왔으며, 끝내 지난 1월 21일 종간을 선언해야 했다. 기실 이것이 교지 「관악」만의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대학신문』 역시 ‘읽는 이가 없어져가는’ 지금의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독자들이 ‘읽고 싶어하는’ 컨텐츠를 생산한다는 것은 이제 즐거운 고민의 대상이 아니라 대학 언론 그 자체의 존립을 결정짓는 요소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단지 ‘읽고 싶어지는’ 신문을 만드는 것이 정론직필의 대학 언론이 취해야 하는 유일한 방법론인 것은 아니다. 이것이 극단화됐을 때 우리는 소위 ‘기레기’들을 질타하곤 한다. 대신 기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독자들이 ‘읽어야 하는’ 기사들을 써내는 것이다. 이해 관계에 취약한 기성 언론에 대해 사회적인 불신감이 자리 잡아가는 이 때, 어쩌면 ‘읽어야 하는’ 것을 써내는 것은 ‘읽고 싶어지는’ 것을 써내는 것과 같은 선 상에 놓여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1869호 『대학신문』은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한결 여유로워진 학내 시계와는 달리 학외의 시계는 방학에도 아랑곳 않고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음에도 『대학신문』에는 3개월여에 걸친 공백을 메우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당장 지난 20일에는 3년 만의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진행됐다. 대북관이 대규모 편가르기의 절대적 기준인 것 마냥 취급되고 있는 현 세태에 직면해 『대학신문』에는 맹목적인 친·반북을 넘어선 대안적 시각을 담아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또 현 정부 출범 1주년이 되는 25일이 채 되기도 전에 기성 언론들은 지금까지 현 정부의 정책적 성과에 대한 분석 기사를 쏟아냈다. 대학생들의 입을 대변한다는 『대학신문』도 심층적인 정책 평가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신문』은 또 한 번 정시 열차를 놓치고 말았다. 16면 중 14면을 졸업특집으로 채웠고 그나마 남은 2면에도 오로지 학내 기사들만을 실은 『대학신문』에는 ‘읽고 싶어지는’ 기사는 있어도 ‘읽어야 하는’ 기사는 적었다.

감히 지난 호 『대학신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객전도’의 상태를 면치 못한 셈이라 할 수 있다. 관습 때문일 수도 있고 개강이라는 시기 상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간으로 발행되기 때문에 안 그래도 좁은 지면을 더 치열하게 구성해야 하는 『대학신문』으로서는 졸업특집에 할당된 면을 줄여서라도 사회면 등을 추가로 배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새 학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중차대한 사안들은 많다. 다만 『대학신문』이 우리가 ‘읽어야 하는’ 신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전명준
자유전공학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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