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미국,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노래와 함께 평화와 변화를 꿈꿨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시작이다. 노래가 가진 힘에 대한 믿음은 비단 우드스탁만의 것은 아니다. 존 레논의 「이매진」에서부터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까지, 많은 이들은 노래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믿었다. 하지만 우드스탁은 미국을 바꾸지 못했고, 단지 노래만 남았다.

한국에는 단지 노래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듯하다. 얼마 전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그 중 노래를 부른 것이 이적행위로써 유죄라는 판결이 포함되었다. 90년대 중반 대학가 술자리에서 흔하게 듣던 「혁명동지가」는 그렇게 국가를 전복하려는 무시무시한 음모 한 가운데에서 다시 등장했다.

국가 정보기관이 조직적으로 여론 조작을 해도, 경찰 최고위층이 대선 직전 거짓 기자회견을 해도 처벌받지 않았다.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행위’가 문제되지 않는 세상에서 대신 ‘말’과 ‘노래’가 처벌받는다. 만약 노래가 노래 그 이상의 무엇이라면, 처벌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점에서 그들은 옳다. 그 때 그 시절 수많은 노래를 금지할 때부터, 많은 이들이 포기했던 노래의 힘을 계속 믿고 있었나 보다.

▲ 삽화: 이예슬 기자

얼마 전, 「또 하나의 약속」이 개봉했다. 제작비가 없어서 많은 이들이 힘을 모았던, 대형 영화관들이 거부해 많은 이들의 힘을 통해서야 조금이나마 상영할 수 있었던 영화였다. 배우 박희정은 영화가 개봉하기 전,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단체인 「반올림」의 후원 행사에 찾아와서 극중 등장하는 산울림의 「회상」을 불렀다. 낯선 공간에 쉽지 않은 발걸음을 한 그의 마음 씀씀이를 생각해본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정성들. 그런 마음들이 모여 소중한 작품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으리라.

숱한 남학생들이 핑클 빵을 먹던 그 시절부터, 우리 또래들을 매료시켰던 이효리는 어느 즈음부터 노래하지 않아도 마음을 전달하는 가수가 되었다. 얼마 전 그는 편지와 함께 4만 7천원을 ‘노란봉투’ 프로젝트에 전달했다. 손배가압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금인 그것은 “일하는 남편의 아내로서, 애 키우는 엄마로서,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여자”인 한 시민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쌍용차 노조가 47억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본 뒤, 10만명이 4만 7천원을 내면 어떻겠냐는 편지를 보냈다. 다른 이의 삶에 대한 그녀의 따뜻한 공감은 이효리를 움직였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세심한 배려와 함께한 이효리의 마음은 다시 1만여명의 4만 7천원으로 늘어났다. 그렇게 계속 퍼져나가는 마음들은 외롭게 버텨나가고 있던 헌신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울림을 주고 있다.

국가 재정을 위해 복지 부정수급자를 색출하겠다는 정부 방침 앞에서, 고작해야 몇십만원 기초생활보장비도 못 받은 채 미안한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세 모녀의 삶은 중요치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경제 발전이라는 당위 앞에, 헌법이 보장한 단체행동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옥살이와 함께 자신이 평생 벌어도 못 갚을 손배가압류를 당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삶은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답을 한다. 우리는 노래할 수 있다. 서로에 공감하고 배려하며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 것이다. 노래만큼 좋은 세상.

김경근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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