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김유정 기자

 

과학은 진정 합리적인가. 흔히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학문으로 평가되는 과학에 의문을 던진 과학사학자가 있었다. 바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하나로 꼽히는 토마스 새뮤얼 쿤이다.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책 『과학혁명의 구조』는 2012년 출간 50주년을 맞아 4판이 발행됐다. 4판에는 미국의 분석철학자 이언 해킹이 쓴 40페이지 가량의 서문이 추가됐는데, 이언 해킹은 서문을 통해 책 내용을 설명하며 “위대한 책은 드물다. 이 책은 위대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쿤의 책은 과학·기술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계적 고전에 속한다. 도대체 『과학혁명의 구조』의 어떤 점이 사람들에게 혁명적이었을까. 4판 번역을 담당한 홍성욱 교수(생명과학부)를 만나봤다.

 

  쿤과 『과학혁명의 구조』는 홍성욱 교수에게 있어 의미가 크다. 홍 교수는 쿤의 책이 “과학의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된 뒤 첫 번째로 접했던 책”이라며 “학부생 때 읽고 과학이 실제로 쿤이 설명한 특성을 갖고 있는지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밝혔다. 또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서 그의 박사 과정 논문을 지도해준 부크왈드 교수(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과학사)는 쿤의 애제자여서 홍 교수는 쿤과 『과학혁명의 구조』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학업을 마친 이후 귀국한 그는 “한글로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었는데 잘 읽히지 않았다”며 “많은 사람이 읽는 책인 만큼 가독성을 높여 번역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중 4판이 출간돼 번역에 참여하게 됐다”고 답했다.

홍성욱 교수에게 고전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 그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경험하는 방식을 뒤엎은 책”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고전으로 꼽힌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과학’은 객관적, 합리적, 보편적 학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이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합리성을 지향하는 모습에서 현대사회에서 과학이 갖는 권위를 확인할 수도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규 교육과정의 과학 수업을 통해 과학을 처음 접하는데 그때 접하는 과학은 답이 명료하고 누가 문제를 풀거나 실험을 해도 답이 일정하다. 이런 경험은 과학이 보편적이라든가 합리적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쿤은 실제 과학이 우리가 가진 과학의 이미지와 달리 비합리적인 판단 절차를 거친다고 주장하며 학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에 대한 근거를 과학 활동을 수행하는 과학자 공동체의 특성에서 찾는다. 과학자는 자연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들을 해결하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며 스스로에게 유용한 도구들을 갖게 된다. 그런 경험이 축적되면 과학자 공동체는 그런 도구들을 공유하게 되는데 이 때 그 도구들의 총합이 바로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패러다임을 획득하기 이전의 과학을 ‘전(前)정상과학’, 이후를 ‘정상과학’이라 칭한다. 과학자들은 연구를 지속하면서 패러다임을 이용해 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패러다임을 더 공고하게 만든다. 하지만 패러다임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등장하고 점차 늘어나게 되면 패러다임에 위기가 찾아온다. 그러던 중 기존 패러다임으로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기존 패러다임과 경쟁하여 결국 기존의 것을 대체한다.

 

쿤이 보기에 과학자 공동체가 딜레마에 빠지는 지점은 기존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이 경쟁하는 시기이다. 그는 과학자들이 특정 순간에 두 패러다임 중 어떤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판단을 하기 어려운데 그때 심리적·미적 요인이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즉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두 패러다임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패러다임이 더 익숙하다든가 특정 패러다임이 더 단순해 미적으로 아름답다는 이유가 선택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기존의 과학에 대한 이미지와 상충한다. 기존에는 과학을 합리적인 활동이라 여겼고, 과학의 발전 방식을 진리를 향해 다가가는 ‘진보(progress)’의 개념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쿤은 과학의 진행 과정에 ‘비합리적’ 요소가 개입하는 지점이 있다는 점에서 전자를 반박했다. 후자의 경우 쿤의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에서 반박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데, 이는 과학자가 자연을 보는 방식이 변하면서 기존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 사이에 소통이 단절된다는 개념이다. 즉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과학자는 마치 ‘세상을 거꾸로 보게 하는 안경’을 낀 것 같은 경험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기존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 사이에는 공유할 토대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기존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은 선형적인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측면을 보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과학의 발전은 지식의 누적으로 인한 일관된 진보가 아니게 된다.

 

이에 대한 과학자들의 시선은 어떨까. 홍 교수는 “과학자들의 의견은 다양하다”며 “쿤에 대한 판단은 과학에 대한 과학자의 생각에 따라 달라진다”고 답했다. 과학자들 중 자신이 얻은 지식에 불확실한 점이 많다는 점을 인정하는 경우 쿤의 설명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지만 과학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경우 쿤의 주장에 비판적이다. 이어 그는 “정상과학이 패러다임을 획득하고 나서 과학이 극단적으로 전문화된다고 설명한 것에 대해서는 보편적으로 동의한다”며 “하지만 과학혁명이나 공약불가능성, 과학이 ‘진보’가 아닌 ‘진화’와 비슷하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과학자들도 많다”고 말했다.

 주장에 대한 과학자들의 의견은 ‘공감’에서부터 ‘비판’까지 다양하다. 과학자 일반이『과학혁명의 구조』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상황은 역설적으로 과학사회학이나 과학사 같은 이른바 ‘과학학’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과학학은 과학에 대해 역사적, 철학적, 사회학적 분석을 하는 학문을 총칭하는 것으로 과학 연구자의 시선이 아니라 다른 학문의 시선으로 과학을 성찰한다.

과학 연구자들은 연구에 대해서는 전문가지만 과학 활동 일반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쿤이 과학사 연구를 통해 제시한 ‘과학의 특성’은 과학 연구자들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다. 과학자들이 동의하건 하지 않건 그들은 쿤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봤고 분명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홍 교수는 “과학에 대한 목소리가 과학 연구자의 것뿐이라면 바람직하지 않고 사회를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며 “과학에 대해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목소리가 더해지는 게 사회나 과학의 지속가능성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과학혁명의 구조』의 현대적 의의를 묻는 질문에 홍 교수는 “우리는 교과서를 통해 처음으로 과학을 접하기 때문에 과학이 합리적, 객관적이라는 이미지를 먼저 갖는다”며 “따라서 과학이 인간에게 중요한 것으로 남아있는 한, 쿤의 책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과학기술이 사회의 중요한 요소가 된 지금,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 과학의 맨얼굴을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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