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분들은 그걸 원칙이라고 하죠”

이주노동자들의 건강보험료 산정기준이 경직된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한국이주민건강협회 김미선 상임이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의료 사각지대에 내몰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취재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들을 위해 마련돼 있던 제도였다. 아파도 거리에 방치돼 있을 수밖에 없었던 노숙인은 노숙인 복지법의 시행으로 의료급여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해 빚이 늘어가던 생계형 체납자도 결손 처분을 통해 보험료 체납액을 탕감 받을 수 있었다. 합법 체류 이주노동자는 2006년부터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미등록 이주노동자도 외국인근로자 건강관리지침을 통해 일정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일련의 제도들은 때때로 원칙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노숙인 복지법은 원칙상 까다로운 수급 요건을 갖춘 뒤 지정된 의료시설을 방문한 노숙인에게만 급여혜택을 제공하고 있었다. 또 원칙은 경제력이 없는 노숙인도 비급여 진료비 전액을 본인이 부담하도록 해 정책주체 간 비용 떠넘기기를 유발했다. 올 7월부터 시행될 새로운 원칙인 체납자 건강보험 사전 제한 제도에 따르면 생계형 체납자는 병원 문앞에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됐다.

원칙은 물론 중요하다. 원칙의 일관성과 지속성은 제도의 형평성과 공정성을 담보한다. 때문에 권리를 부여하거나 의무를 지울 때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도 기꺼이 수용한다. 하지만 그 원칙이 어떤 가치를 딛고 서 있는지는 따로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원칙은 윗분들의 복지부동(伏地不動)에 대한 핑곗거리로 전락한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보건의료정책의 원칙은 경제 활성화와 경쟁력 강화라는 가치 위에 서 있는 듯하다. 작년 말 정부는 4차 투자활성화대책을 발표하면서 의료서비스산업의 선진화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겠다고 공언했을 뿐 사각지대로 밀려난 사람들의 아픔을 어떻게 보듬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보여주지 않았다. 새로운 수익기반을 확충할 때 수급 요건의 까다로움이나 연소득 500만 원 미만의 삶, 단속에 쫓겨 기초적인 의료서비스조차 사치가 되는 이들은 주목받지 못했다. 효율성이란 가치는 정책 담당자들이 서비스 산업 육성에만 집중할 수 있는 변명거리를 제공한다.

어느 때보다 ‘법과 원칙’이 강조되는 지금, 우리 사회의 ‘법과 원칙’은 어떤 가치에 뿌리 내리고 있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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