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경 강사
노어노문학과
‘나’는 항상 ‘너’가 궁금하다. ‘나/너’는 어떤 인간인가. 지금 손에 들린 책이 얼마간은 해답이 될 수 있다. 선생으로서 제자의 속내가 궁금하고 번역가이자 소설가로서 젊은 독자의 속내가 또 궁금하다. 지난 10년 동안 비교적 꾸준히 맡아온 『러시아명작의 이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이유 중 하나도 그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공과 학년대가 다양하고 인문대 강좌치고 수강생이 적지 않은 편이라 평소 은둔과 침묵을 선호하는 아이들의 생각도 들어볼 겸 나름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지 몇 년 됐다. 즉, 단답형과 서술형으로 이루어지는 기말고사의 마지막 문항을 러시아문학을 제외하고 최근에 흥미롭게 읽은 책 얘기를 써달라는 것으로 낸다. 점수의 차등 없이 가급적 한국문학이면 좋겠다는 바람도 덧붙인다.
 
이렇게 얻은 소중한 답안을 따로 분석해 본 적은 없으나 어떤 인상은 남아있다. 우선 시집에 대해 쓴 경우가 거의 없다. 한 시절 대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시를 읽었던가. 지금 학생들에게 이성복, 기형도, 황지우, 황동규, 최승자 같은 이름은 퍽이나 낯설 듯하다. 언젠가 심보선의 시집이 언급된 것에 감동한 것을 보면 젊은 시인도 별로 호소력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덕분에 소설을 향한 지속적인 관심이 부각된다. 신화시대 때부터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이나 듣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 새삼스레 증명된다. 사랑받는 이야기의 양상도 엇비슷하여, 많이 언급되는 소설은 국내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원로급 황석영과 김훈, 중견급 공지영, 신경숙, 사십대에도 영원히 젊은 작가 김영하, 김연수, 박민규, 정이현 등이다. 김애란의 소설이 매 학기 언급되는 것은 어느덧 삼십대 중반이 된 그녀 소설의 매력을 고려하면 지당한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에 한국문학을 읽은 적이 없다” 혹은 “원래 한국문학 잘 안 읽는다”라는 답안이 절대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개는 양보적인 어조이지만 야무진 어조도 적지 않다. 동서양의 고전문학도 아닌 현재의 한국문학에 할애할 시간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이다. 이런 경우 답안은 주로 코엘료, 하루키, 베르베르 등 인기 외국 작가의 소설이거나 『총, 균, 쇠』 같은 교양 인문서이다.
 
무슨 책이든 읽지 않는 것보다 읽는 것이 좋다. 목적론과 실용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소일거리-독서로부터 당당히 돌아선 아이들을 핀잔하는 것은, 그것이 청출어람의 결과인 만큼, 멋쩍은 일이다. 문학은 본질상 생활, 즉 ‘먹고사니즘’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일단은 좋은 문학, 도도하고 고고한 문학이 많이 나와야 한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몫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소설이 ‘신이 내린 소설’인 것은 맞지만 천재의 탄생에 앞서 질 좋은 문화 토양이 있었고 이후 그들을 위해 기념비를 세워준 무수한 독자들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좋은 독자는 좋은 저자보다 더 ‘독특한’ 존재이고 “읽기는 쓰기 후에 일어나는 행위”, “보다 문화적이고, 보다 지적인 행위”(보르헤스, 『불한당들의 세계사』)이다.
 
덧붙여, 뭐니 뭐니 해도 “문학은 인간에 대한 사랑”(나보코프, 『절망』)이고 사랑은 늙어감에 대한 어떤 위로에도 불구하고 젊을 때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다. 우리의 젊은 지성이 바로 그 젊음과 지성에 자긍심을 갖고서 우리 문학을 잘 키워주고 더불어 그들 역시 잘 자라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또다시 3월, 또다시 한 학기의 시작이다. ‘나’는 항상 ‘너’가 궁금했지만 지금 그 궁금증은 더 크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