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예슬 석사과정
음악과 이론전공
가끔은 계속 멍청하고 싶다. 더 배우고 더 전문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대학원에 왔지만, 지식과는 별개로 알기 싫은 것들이 있다. 사회에 대한 문제다. 사람이 셋 이상 모이면 정치가 시작되고, 집단에선 언제나 갈등이 일어난다지만 요즘은 그걸 보고 있자니 좀 지친다. 뉴스에서 들리는 온갖 부정부패와 사건사고들, 누군가의 뒷이야기, 인터넷에 떠도는 아주 더러운 말들 등등.
 
누군가 ‘아는 것이 힘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 둘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내심 후자를 고르고 싶다. 안다는 것엔 어떤 책임감이 뒤따른다. 부정부패를 보면 지나치지 않고 이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한다던가, 누군가의 뒷이야기를 듣는다면 동조를 하거나 역으로 두둔하거나. 앎은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에 따라 어딘가에 새로이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어떤 사안을 암묵적으로 용인하기를 강요받느니 차라리 난 아무것도 모른 채 무책임하고싶다.
 
내 앎에 뒤따르는 행동들이 뭐든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할 수 있다면 나는 아는 것이 힘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나는 ‘알아 봤자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나’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무기력한 나를 보느니 무책임한 나를 보는 게 나로서는 마음이 편하다. 언젠가 친구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때의 장점은 그 일이 잘됐을 땐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데도 잘됐어! 하며 기뻐할 수 있고, 잘 안됐을 땐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거라고 변명할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내가 하는 일에도 마음을 쓰지 않으려 하는데 하물며 세상의 일들은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부패한 정치인들, 억울하게 해고된 노동자들, 적은 형량을 받은 흉악범, 비리, 특정 계층 비하 등 마냥 지나쳐서는 안 될 화나는 일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 그런데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물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꾸준히 올바른 판단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가끔은 맥이 빠진다. 내 권한 밖에 있는 것들을 마주할 때 느끼는 무력감 탓에 앎의 대가를 치르기보단 눈과 귀를 닫게 된다.
 
소설가 한유주는 한 인터뷰에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다 알고도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답했다. 나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거의 존경심이 들었다. 나는 나쁜 일을 보면 너무 화가 나고, 좋은 일을 보면 너무 기쁘고, 슬픈 일을 보면 너무 슬프다. 모든 걸 다 알고도 분통해서 참을 용기가 나는 없다. 내 영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면 알수록 나는 점점 더 작아진다.
 
그러나 알고도 모른 체하기는 좋은 일도 아닐 뿐더러, 힘들다. 잠깐 마음 편하자고 숨거나 지나쳐버리면 방치되어 썩은 사랑니처럼 머리가 깨질 듯한 아픔을 선사할 것이다. 사랑을 알 때쯤, 지혜를 알 때쯤 나는 게 사랑니(wisdom tooth)라던가. 내가 멍청하고 싶은 것도 비슷하다. 그 앎을 방치해두면 내 마음도 그 문제도 점점 더 곪아가겠지. 우리는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나와 너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조금 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만큼, 앎을 두려워하게 만든 이 사회도 온전하진 않은 것 같다고.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