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를 보다 더 전문화 하고 서비스의 질을 한층 더 개선하게 되면 환자의 편의가 좋아지는 것은 물론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투자 활성화와 원격진료의 도입이 의료 서비스를 질적으로 향상시키고 보편적 의료 접근권을 확대시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대가 의료 사각지대에도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관심 밖인 의료 사각지대에선 여전히 많은 사회적 취약계층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이들은 허술한 제도에 매달려 지원도 관리도 부족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여전히 위태로운 노숙인 건강

서울시에서 노숙인 의료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A 주무관은 얼마 전 한 노숙인을 상담했다. 그 노숙인은 제주에서 서울까지 아픈 몸을 이끌고 왔다고 했다. 2012년 6월부터 시행된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 지원에 관한 법률̓(노숙인 복지법)의 시행으로 요건만 갖추면 제주에서도 의료 급여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하지만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그는 “제주도의 담당자가 여비를 주며 ‘서울역 앞에 쓰러져 있으면 서울시가 치료해 줄 것’이라 했다”고 털어놨다. A 주무관은 “다른 지방자치단체가 의료비를 부담하기 싫어서 노숙인을 서울로 보내는 일이 종종 있다”며 한숨지었다.

노숙인의 재활과 자립을 위해 마련된 노숙인 복지법과 개정된 의료급여법이 시행된 지 1년이 훌쩍 지났지만 노숙인의 건강은 여전히 위태롭다. 노숙인 복지법의 시행으로 노숙인도 의료급여 수급권자(의료급여 1종)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요건이 까다로워 급여혜택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노숙인이 급여혜택을 받기 위해선 3개월 이상 노숙인이었다는 점을 증명해야 하며, 건강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거나 장기 체납자임을 확인받아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숙인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이 거리에서 생활하므로 자신의 행적을 입증하기 어렵다. 또 일부 시설 노숙인들은 정부가 실시하는 자활근로 사업 등에 참가해 보험료를 일정기간 납부했다는 이유로 수급자에서 배제됐다.

설령 노숙인이 요건을 갖춰 수급자로 선정되더라도 이들은 의료시설 이용에서 차별을 겪게 된다. 현재 노숙인은 지정병원제도로 인해 특정 의료기관에서만 급여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에 따라 지정병원이 없는 곳도 있어 노숙인이 수급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해까지 광주, 울산, 충북, 경남의 경우 노숙인 진료시설로 지정된 2차 의료기관이 없어 노숙인의 의료기관 이용이 제한돼 왔다. 홈리스행동 이동현 상임활동가는 “타 의료급여1, 2종 대상자들은 자기가 가고 싶은 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데 노숙인 의료지원 대상자들만 지정된 병원을 이용하도록 하는 것은 차별”이라며 제도의 불평등함을 지적했다.

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지방정부 상호간에 비급여 진료비를 서로 미뤄온 것도 문제다. 의료급여법에 따르면 1종 의료급여 수급자도 비급여 항목은 전액을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하지만 비급여 진료 비중이 높은 정신 질환과 같은 경우 노숙인은 비용을 부담할 능력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한다. 이에 각 지방자치단체는 별도의 지원계획을 마련해 노숙인의 비급여 진료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보건복지부는 노숙인의 의료비를 지원하는 지방자치단체에게 소요된 예산의 일부를 지원해 왔다. 그러나 법적으로 비급여 진료비를 부담하는 주체는 노숙인 본인이기 때문에 보건복지부와 지방정부, 지방정부 사이에선 자체 예산을 쓰지 않기 위해 의료비를 떠넘기는 일이 발생해왔다. 노숙인 자활업무를 담당하는 한 공무원은 “국가에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조성해 사업을 담당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현 제도의 한계를 지적했다.

건강보험 체납자 의료 이용 사전 제한

지난달 5일 보건복지부는 올 7월부터 건강보험료 장기 체납자와 무자격자의 건강보험 이용을 사전에 제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장기 체납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저소득층의 병원 이용이 더 어려워질 전망이다.현재 건강보험공단은 보험료를 6회(6개월) 이상 체납한 장기 체납자들이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경우 우선 진료비를 지급하고 있다. 지급된 진료비는 이후 부당이득금의 형태로 체납자들로부터 환수해 왔다. 그 과정에서 체납자들은 재산과 소득을 가압류 당하거나 통장거래가 제한되기도 하는데 이는 체납자들의 경제활동까지 제약해 생계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7월부턴 건강보험료 장기 체납자들의 의료기관 이용이 사전에 제한된다. 앞으로 시행될 조치에 따르면 의료기관은 진료 전에 환자의 체납 여부를 확인한 뒤 체납자의 경우 환자에게 진료비 전액을 청구하게 된다. 정부는 이번 조치를 통해 체납자의 부정수급을 방지하고 건강보험의 재정 부담을 완화시키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보건복지부가 생계형 체납자들의 처지를 외면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건강보험료 장기 체납은 현행 보건의료제도의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생계형 체납자 중 89%는 일자리가 불안정해 연소득 500만원 미만으로 살아가는 형편이다. 이들 대부분은 사업 실패나 질병 등 일시적 빈곤상태에서 보험료 체납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생계형 체납자에 대해서는 보건의료제도 상 별다른 구제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아 기초생활보장대상자로 선정돼 의료급여 수급자가 되지 않는 한 체납자 신분에서 스스로 빠져나오기 힘들다.

또 의료급여 대상자가 된다 해도 체납된 보험료는 소멸되지 않고 빚으로 남아 체납자들의 발목을 잡는다. 건강세상네트워크 김정숙 집행위원은 “체납자라는 이유로 사전제한제도를 만드는 것은 빈곤층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반인권적인 행위”라고 지적하며 보험료 납부 의무를 즉각 소멸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이에 대해 체납자의 도덕적 해이와 체납자 간 형평성 문제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주노동자 의료정책은 그림의 떡

당뇨를 앓고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B씨에게 병원 문턱은 높기만 하다. 당뇨는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지만 건강보험 무자격자인 그는 높은 진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다. 오늘은 서울 혜화동에 있는 무료진료소 ‘라파엘 클리닉’을 찾아가려 했으나 단속반이 떴다는 소문이 돌아 포기했다. 이날 라파엘 클리닉을 찾는 발길은 평소의 절반 이하로 뚝 끊겼다.

2014년 1월 기준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은 157만 명으로 10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이들을 위한 의료 안전망 구축 수준은 제자리다. 2007년 발효된 ‘재한외국인 처우 기본법’에 따라 국내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을 대상으로 종합적인 외국인 정책이 실시돼야 하지만 실상은 보건복지부나 여성가족부 등 개별 부처가 단발성으로 시행하는 정책에 그치고 있다.

현재 B씨와 같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정부로부터 제도적 지원을 받기 어렵다. 2000년 질병관리본부가 각 보건소 등에 ‘외국인근로자 건강관리지침’을 내려 인도적 차원으로 미등록 이주민에게 보건의료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한 바 있지만 정부의 단속 탓에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서비스를 마음 놓고 이용할 수 없다. 또 남양주나 안산 등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업무 가중과 예산 편성의 어려움을 이유로 서비스를 중단했다가 관련 시민단체의 항의로 다시 시행하기도 했다.

때문에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민간단체가 운영하는 무료 진료소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민간단체 역시 재정난과 인력난으로 의료서비스 제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표적인 민간 무료진료소 라파엘 클리닉은 환자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고 냉난방 시설이 부족한 인근의 고등학교 복도나 강당에서 진료활동을 해 왔다.

합법체류 이주노동자도 사정이 어렵긴 마찬가지다. 2006년부터 합법체류 이주노동자도 건강보험 가입이 가능해졌지만 현재 가입률은 50%를 넘지 못한다. 가입이 선택사항이기 때문에 보험료가 부담스러운 고용주와 임금이 낮은 업종에 종사하는 이주민이 가입을 꺼리기 때문이다. 한국이주민건강협회 희망의 친구들 김미선 상임이사는 “합법체류 외국인의 경우 전년도 그 지역의 평균 보험료를 일괄적으로 부과하는데다가 외국인 등록을 한 날을 기준으로 소급적용 한 보험료를 납부해야 하는데 이는 재산이나 소득이 미미한 이주 노동자들의 현실을 외면한 기준”이라며 보험료 및 보험료 산정기준의 현실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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