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의 박수근이 밀레의 작품 「만종」 앞에 섰다. 전원의 풍경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은 박수근에게 깊은 감명을 줬다. 이후 박수근은 농촌과 서민들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다. 박수근의 소박한 화풍과 달리 그의 그림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 중 가장 비싸기로 유명하다. 다만 과연 박수근이 ‘국민 화가’인지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박수근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인생과 작품세계에 대해 알아보고, 논란들 또한 살펴보자.

◇그림 같은 삶을 살다간 화가=박수근이 1964년에 그린 그림 「마을」(그림①)에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이 보인다. 1914년 강원도 양구의 한 시골 마을, 박수근은 이 그림에서처럼 작은 집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농업과 상업에 일가견이 있었던 아버지 덕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박수근은 밀레의 그림을 본 후 화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1921년,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평생을 뒤따르는 가난이 시작됐다. 돈이 없어 중학교에 진학하지도 못했던 그는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덕분에 박수근은 대부분의 화가 지망생들이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서양식 화풍을 배우던 것과는 달리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18세가 되던 해 박수근은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했다. 추운 겨울만 같았던 화가 지망생 박수근의 삶에 마치 햇살이 드리운 것처럼, 그의 입선 작품명은 「봄이 오다」(그림②)였다.

▲ 사진제공: 양구 군립 박수근미술관

하지만 봄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이은 입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부두 노동자, 막일꾼 일을 하며 연명하던 박수근은 지인의 도움으로 미군 PX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그의 삶은 박완서의 소설 『나목』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지만 「세 여인」을 비롯해 심혈을 기울였던 작품들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미술전(국전)에서 번번이 낙선하고 말았다. 그림이 단조롭고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박수근은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하루 이틀 술을 찾기 시작했고 1965년 결국 간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아미술관의 오진이 학예사는 “이후 박수근은 1980년대 한국 정서를 담았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기 시작하면서 지금처럼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됐다”고 말했다.

▲ 사진제공: 양구 군립 박수근미술관

◇수근의 그림을 둘러싼 논란들=양구 군립 박수근미술관의 엄선미 학예연구사는 박수근의 그림에 대해 “힘겨운 삶을 살았던 이웃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봤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박수근’ 하면 떠올리는 울퉁불퉁한 질감의 그림은 1940~50년대의 작품이다. 그는 그림 속에 한국전쟁 이후 민중들의 피폐한 생활상을 담았다. 아낙들의 빨래하는 모습 외에도 일거리를 기다리고 있는 중년 남성들의 모습, 막내동생을 업고 있는 단발머리 소녀들을 그렸다.

박수근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울퉁불퉁하면서도 두꺼움 질감을 내 마치 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엄선미 학예사는 “박수근의 기법은 그가 1950년대 후반 경주의 마애불과 고구려 벽화에서 영감을 얻어 완성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임파스토’라고도 불리는 이 기법은 물감을 한 층씩 쌓아올리는 기법이다. 우선 캔버스에 흰색 혹은 회초록색 바탕칠을 한 뒤, 나이프로 물감을 떠서 언덕을 만들 듯 쌓아올린다. 물감이 마르면 앞의 작업을 반복한다. 한 층이 올라가면 줄지어 앉아 있는 여인들이 보이고, 또 한 층이 쌓이면 그들이 시냇가에 앉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층까지 이르러서야 비로소 빨래를 하는 여인들이 드러난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소박함 때문인지 박수근은 ‘한국적 정서를 담은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김정희 교수(서양화과)는 “박수근은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시골과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렸을 뿐 우리나라의 한국적 정서를 담으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화풍에 관해서도 의견이 나뉜다. 김정희 교수는 “대상을 소묘한 방식이 단순하며 전반적으로 색조도 단조롭다”라며 비판한다. 이에 반해 엄선미 학예사는 “그의 그림이 단색조로 느껴지는 이유는 흰 바탕색을 칠하고 그 위에 다른 색을 칠하는 작업이 반복되다 보니 색조가 아래에 묻혔기 때문”이라며 “이를 단조롭다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박수근의 그림의 높은 가격에 대해서도 논란이 오간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미술품 경매에서 그의 작품은 동시대 작가인 김환기, 이중섭을 제치고 국내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박수근의 그림은 해외에서 인기가 높다. 엄선미 학예사는 “1940~50년대 반도화랑의 판매 영수증들을 보면 한국적 정서를 담은 박수근의 그림은 외국인에게 수요가 많았다”고 말했다. 해외에서의 높은 평가는 당시 국내에서 대중적이지 않았던 박수근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김정희 교수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 한국에 대해 그렸다는 점이 이국적이고 동양적인 것을 좋아하는 외국인들의 흥미를 끌었을 뿐”이라 주장한다.

▲ 사진제공: 양구 군립 박수근미술관

탄생 100주년을 맞은 박수근. 그가 진정한 국민 화가인지에 대해선 아직 논란이 있다. 엄선미 학예사는 “박수근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희 교수 또한 “객관적인 연구만이 화가의 진정한 가치를 밝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예술가의 작품과 그 안에 담긴 예술관이 이어지기 위해선 많은 노력들이 필요하다. 무조건적인 논쟁보다는 꾸준한 연구와 비평을 통한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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