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라는 ‘무정’한 이정표, 그 앞에 선 우리
근대라는 ‘무정’한 이정표, 그 앞에 선 우리
  • 정승호 기자
  • 승인 2014.03.15 16: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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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이혜빈 기자 beliveyourse@snu.kr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근대 100년 최고의 베스트셀러’. 이광수의 『무정』을 수식할 때 빈번하게 쓰이는 말이다. 나아가 한국소설 중에서 고전을 논할 때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소설이 『무정』이다. 주인공 ‘영채’와 같은 이름을 가진 서영채 교수(아시아문명언어학부)도 서른에 우연한 계기로 『무정』을 처음 접하고 그 속에 담긴 많은 이야기에 매료돼 석사논문 주제로 정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도 그는 『무정』에 관한 연구를 계속 해오고 있다. 그를 찾아가서 고전이란 무엇인지, 『무정』을 어떤 점에서 고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물었다.

그는 “고전이란 사회의 씨앗이 풍부하게 저장돼 있는 봉숭아 같다”고 비유했다. 즉, 한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의 지식이 기억되고 재생산되기 위해 구성원들의 감각, 취향, 견해가 반영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그는 “고전을 통해 한 공동체에서 요청하는 시대정신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고전을 읽음으로써 그 자신이 속해있는 ‘지금 여기’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무정』을 고전이라 칭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일제강점기 당시 근대를 마주했던 조선인의 사상과 그들이 겪은 처참한 현실이 장편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보존돼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근대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대상”이었으며 그것은 ‘전통적 가치의 유린’과 ‘이성의 빛’이라고 했다.

『무정』은 강간당한 영채를 통해서 전자를, 그 이후 영채의 행보를 통해서 후자를 담아냈다. 서 교수는 “대부분의 한국인은 법으로 서술된 이념과 별개로 조선을 정서적으로 이어진 공동체라고 생각하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비록 우리 헌법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는다’고 서술됐을 뿐 조선과의 연관성을 언급하지 않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무정』은 우리 공동체 지식의 기억이라는 고전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는 독자들이 『무정』에서 고전의 가치를 보고자 할 때 작품 내 두 가지 지점에 주목하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우선 작품 전반부를 이끌어나가는 형식, 영채, 선형의 삼각관계 구도와 이로부터 야기되는 긴장이 해소되는 양상이다. 동경 유학생 출신이며 경성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는 형식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선형의 과외공부를 담당한다. 그러던 중 옛 스승의 딸인 영채가 기생 신분으로 형식의 눈앞에 나타난다. 형식은 선형과 영채 모두에게 연인으로서의 흥미를 느낀다. 그러나 삼각관계는 동등한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의 선택지를 선택할 것을 전제하는 관계다. 따라서 형식은 영채 또는 선형 중 한 여자를 선택해야 한다.

이때 영채의 아버지인 ‘박진사’는 머리를 짧게 자른 검은 옷을 입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는 동학, 즉 당시 자생적으로 근대화를 시도했던 세력을 표현한 것이다. 반면에 선형의 아버지인 ‘김장로’는 응접실의 유리창을 설치하고 서양식 의자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이는 개화파 즉 외부로부터의 근대를 받아들이는 것을 주도했던 세력을 표현한다. 결국 삼각관계 구도는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진사’와 ‘장로’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형식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받지 못했으며 외부로부터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경성학교 교주의 아들 김현수와 학감 배명식이 영채를 강간한 것이 형식에게 선택의 계기가 된 것이다. 김현수는 일제의 국권 강탈에 협력한 부일(附日) 귀족을 상징하며 배명식은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사익을 우선시하는 매판지식인을 상징한다. 이에 대해 서 교수는 “영채가 강간당한 사건은 두 세력에 의해서 무참하게 유린당한 우리의 전통적 가치를 나타내며 『무정』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이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형식은 의리를 위해 영채를 선택할지, 미래를 위해 선형을 선택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선형을 선택한다. 자생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던 세력이 외부로부터 근대를 받아들인 세력에게 패배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서 교수는 “형식이 선형을 선택한 것은 1917년의 현실을 잘 반영한 것이며 때문에 당시 이 작품이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만약 1910년 이전에 『무정』이 쓰였다면 형식의 선택은 달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영채 교수가 『무정』에서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지점으로 꼽은 것은 작품 후반부에서 강간당한 영채가 회복되는 모습이다. 그는 영채의 모티브가 심청이라고 한다. 이때문에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듯 영채는 대동강에 몸을 던지기 위해서 평양행 기차에 올라탄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채는 기차에서 자유분방한 신여성인 병욱을 만나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라는 그녀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된다.

여기서 서 교수는 “병욱의 집이 용궁을 의미한다. 용궁으로 들어가기 전 영채는 이미 죽은 것이며 이는 당시 이광수가 바라본 조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광수에게 아직 정해지지 않은 조선의 미래는 희망이 있었다. 작품 후반부에서 이광수는 영채의 유령을 통해 그의 계몽주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조선의 미래를 그려낸다. 이후 작품의 분위기가 환상적이며 형식, 영채, 선형이 모두 유학을 가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이광수의 ‘이데올로기’는 형식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불쌍한 은인의 썩다가 남은 뼈를 생각하고 슬퍼하기보다 그 썩어가는 살을 먹고 자란 무덤 위의 꽃을 보고 즐거워하리라”. 당시 조선인은 국권 수호와 근대화라는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하지만 서 교수는 “당시 우리는 이들 사이에서 균형 잡기에 실패했다”고 한다. 국권 수호에 실패한 채 근대화에만 몰두한 것이다. 이광수의 분신인 형식의 이 대사는 후일 이광수 역시 이런 균형 잡기에 실패할 것을 예고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무정』은 근대를 처음 마주한 조선이 겪어야 했던 현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이 응축된 결정체이다. 이에 대해 서 교수는 “이광수라는 무당이 시대정신이라는 신내림을 받아 만들어낸 것이 바로 『무정』”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당시 한국인의 사상을 드러내는 자료가 부족한 현실을 고려할 때 『무정』은 문학사적, 사회사적으로 귀중한 사료가 되는 것이다. 서 교수는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읽어보세요. 직접. 한 글자, 한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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