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주받으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프레드 로델 저ㅣ이승훈 역
280쪽ㅣ1만 3천원

한국에는 말다툼의 끝을 선언하는 ‘법대로 하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한국인들의 법의 공공성과 객관성에 대한 일종의 믿음이 나타난다. 각자의 이해에 따른 주장들과는 달리 법은 투입된 문제에 대해 공명정대한 판결을 산출하는 기계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헌법학자 프레드 로델은 그의 저서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에서 법에 대한 신뢰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이 책이 쓰인 1930년대 미국에서는 경제 대공황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위해 뉴딜정책이 시행되고 있었다. 당시 뉴딜정책은 보수 세력의 반발을 사며 연방대법원에 의해 위헌 판정을 받았는데 주목할 점은 위헌 판정이 몇 년 뒤 비슷한 사례에서 번복됐다는 점이다. 이때 바뀐 것은 법의 문구가 아니라 이를 판정하는 법률가들의 해석뿐이었다. 이렇게 법 해석의 자의성이 주목받게 될 즈음 출간된 이 책은 일종의 고전이 됐고, 법체계에 개입되는 법관 개인의 의도나 다른 외부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이 책은 지난 1월에 재번역 돼 한국에 출간됐다. 그런데 이 책이 쓰인 미국과 달리 한국의 사법제도는 법관의 자율적 판단보다는 법조문에 의지하는 성문법체계인데다, 출판된지 70여 년이 흐른 지금은 국민참여재판이나 법률정보공개 등을 통해 법률가와 일반인 사이의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지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법률지식이 난해하다는 비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과 최근 진보정당의 정당해산심판을 둘러싼 첨예한 논쟁은 우리의 법체계도 로델이 제기한 ‘해석에 의한 자의성’ 문제를 완전히 피해가기 어려워 보이게 한다. 이제 그의 ‘법’과 ‘법률가’들에 대한 비판을 살피면서 어떤 공감할만한 문제들이 있는지 그 해결방법은 무엇일지 살펴보자.

그는 책에서 법을 ‘직업적 속임수’라 칭하고 법률가들을 일종의 ‘주술사’, ‘성직자’로 취급한다. 옛날 주술사나 성직자와 같이 법률가들은 일종의 맹신을 기초로 지배기반을 얻는다. 이 맹신은 법률가들과 법체계가 객관적이고 공명정대하다는 믿음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결론적으로 그는 법률가들을 법정에서 몰아내고 각 분야의 전문가로 그 자리를 채우거나 법을 ‘해석’하거나 그 ‘내용’을 밝히려는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시 미국 법체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이었고 더불어 로델은 법률가들을 퇴출시키자는 극단적 주장으로 파란을 일으켰다. 도대체 법률가들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먼저 로델은 법률용어의 난해함을 지적한다. 그는 법이 “매일의 기업과 정부의 활동 그리고 개인의 사적인 삶과 관련된 사실들만을 다루기” 때문에 교양 있는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질권’, ‘저당권’, ‘물상보증’ 등 기본적인 법률용어들조차 이해하기 쉽지 않다. 난해한 법률용어와 복잡한 문장구조는 일반인들이 법률지식에 접근하는 것을 막게 되는데 이것이 로델이 지적한 법률가들의 ‘사기술’ 중 하나다.

더불어 로델이 법을 ‘속임수’라 칭하는 다른 근거는 그것이 내포한 자의성이다. 법률은 고정된 법조문을 갖더라도 이를 ‘해석’하거나 그것의 ‘진짜 내용’을 설명하려는 관습 때문에 고정된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에 의하면 이 때문에 법률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결국 어떤 의미를 선택할지 결정하는 사람은 법률가들이다. 로델은 이런 점을 들어 법 제도가 자의적으로 결정,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 자의성이 법률가들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게 만드는 특성이며 실제 세계에 혼란을 가져오는 주범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수정헌법 14조에는 “어떤 주도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서는 누구로부터도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뺏을 수 없고…”라는 문장이 있는데 본래 이는 재판 없는 형벌 등을 막는 기능을 했다. 그러나 이후 ‘적법한 절차’는 ‘정당한 절차’로 재해석되어 세금징수를 거부하는 용도 등으로 쓰이곤 했다. 법관들은 ‘적법한 절차’라는 단어의 애매함을 적극 활용했고 이에 따라 수많은 비슷한 사례들에 각기 다른 판결이 내려지는 결과를 낳았다. 다른 예로는 앞서 서술한 뉴딜 법안의 위헌 판정을 들 수 있다. 계속하여 뉴딜 관련 법안을 위헌 판정하던 연방대법원의 대법관들은 어느 순간 합헌 판정을 내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오로지 대법관 중 한 명이 생각을 바꿨기 때문이다. 만약 법이 쓰인 그대로 확정된 의미를 갖는다면 위헌이던 법률이 합헌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로델이 이런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방책은 법률가들을 퇴출시키고, 법을 ‘해석’하려는 관습 또는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다. 전자를 먼저 살펴보자. 그에 의하면 법률가들은 법을 제멋대로 ‘해석’해 수십 가지 다른 뜻을 제시하는 존재들이다. 이 때문에 로델은 법률가들을 전부 퇴출시키고 다른 분야의 전문가인 일반인들이 그 자리를 맡는다면 법은 간단하고 일관적으로 이해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법의 자의적 해석 문제가 정당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해도 법률가들을 퇴출시키는 방법으로 이를 해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반인이 법률가의 자리를 채운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를 맡게 된 사람은 결국 법률가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법이 해석되는 이유는 하나의 법조문을 각기 다른 양태의 사건들에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적용은 법이 스스로 판결문을 창출하는 기계가 아닌 이상 항상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이 누군가가 법률가이든 아니든 자의적 법해석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후자의 방책은 법을 ‘해석할’ 필요가 없도록 법을 최대한 명료하게 제정하는 것으로 성문법의 요소를 강화하는 것이다. 로델은 잘 제정된 성문법은 마치 간단한 수학공식처럼 일반인이 사용할 수 있는, 정의의 잣대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성문법체계인 우리나라의 법조문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성문법체계라 하더라도 모든 사례를 담을 수는 없으며 결국 담지 못한 사례는 관습법을 필요로 한다. 더불어 법에 모든 사례를 담으려는 노력은 법률을 복잡하게 만들어 또한 이에 대한 전문가의 수요를 낳을 것이다.

▲ 삽화: 이예슬 기자 yiyieseul@snu.kr

이처럼 로델이 제시한 방책들은 현실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문제의 원인이 단지 법률가들의 횡포만이 아니라면 자의적 법해석과 난해한 법률용어의 사용은 사법제도가 존재하는 어디서든 관찰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얼마 전 대법원은 ‘정기 상여금은 통상 임금에 포함된다’면서도 ‘신의 성실의 원칙에 따라 과거 임금을 청구하지 못할 수 있다’고 덧붙인 바 있다. ‘신의 성실의 원칙’은 성문법은 아니지만 법을 해석하는 원칙 중 하나로 ‘서로 상대방이 약속한 바를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다. ‘신의 성실의 원칙’이 근로기준법보다 우선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일까? 로델이라면 ‘신의 성실의 원칙’이 무엇에 우선하는지는 법률가들이 정한다고 답할 것 같다. 과연 법률가들에게만 이런 권리가 부여돼도 좋을까? 의구심이 드는 독자에게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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