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재성 교수
정치외교학부

동아시아에서 긴장과 갈등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국가들이 군사력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이를 제지할 강력한 기제가 매우 적다는 사실이다. 어느 지역이든 이익의 갈등과 충돌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때 군사력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막을 수 있다면 결국 정치적, 사법적 수단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국가들 간 심각한 갈등이 있어도 군사적 수단을 사용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 유럽연합이 부러운 이유이다. 다자주의나 지역주의, 분쟁 해결 메커니즘, 강력한 시민사회의 역할, 전쟁보다 시장을 중시하는 경제행위자들, 다양한 힘들에 기대를 걸어보지만 동아시아에서 군비경쟁과 공세적 군사전략은 지속되고 있다.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의 단극체제가 지속되는 가운데 동아시아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9·11 테러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점차 수그러지는 가운데 21세기 들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둘러싼 영토분쟁, 중국 대만의 양안 관계와 남북한 관계, 미국과 중국 간 점증하는 군비경쟁 등 군사적 대결로 쉽게 비화할 수 있는 사안들이 긴장도를 높이고 있다. 작년만 하더라도 동중국해에서 중국과 일본의 대립이 군사적 충돌 직전까지 수차례 도달했었고, 방공식별구역을 둘러싼 논란이 심화되었으며, 남중국해를 둘러싼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의 대립이 점증했다. 예산 적자에 허덕이는 미국은 향후 10년간 군사비를 계속 감축해야 하는 반면, 중국은 매년 10% 이상의 군사비 증가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서태평양지역에서 미군사력을 밀어내는 소위 지역거부, 반접근 전략을 펴면서 주변국가들과의 전략 관계 강화에 노력하고 있다. 미국은 아시아 재균형 전략의 이름 하에 기존의 양자 군사동맹을 강화하면서 해양과 공중에서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일본은 중국의 군사력 증강을 목도하면서 집단자위권에 관한 해석 변경을 추구하고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세우는 등 향후 자체 군사력을 증강하여 중국의 도전에 맞서려는 전략 노선을 구체화하고 있다.

주요 갈등을 막을 수 있는 지역적 다자주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불확실한 미래를 믿지 못하는 바가 더 큰 것이다. 사실 근대 국제정치는 군사력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력구제 원칙에 기초할 수밖에 없고, 사력을 다하지 않으면 세력균형의 운명을 벗어나기 힘들다. 국가들의 충돌은 악의를 가진 침략세력에 의해 야기되기도 하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닌 채 구조적 안보딜레마에 의해 발생하는 바가 더 크다. 국제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서로를 비난하는 손가락질에 몰두할 경우 문제의 해결은 더욱 요원해진다.

국제정치적 근대성의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동아시아의 완결되지 못한 근대 이행 때문이다. 19세기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인들은 중국 중심 사대자소 질서에서 서서히 벗어났다. 제국주의를 핵으로 한 서구 주권국가질서가 전파되면서 어떤 국가에게 이러한 변화는 기회로 다가왔고, 다른 국가에게는 모멸로 다가왔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전쟁과 식민정복, 강대국 간 대립이 있었다. 국제정치적 근대를 이루려면 주권과 영토, 국민의 범주가 확정되고 다른 국가가 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국가들 간 주권 평등과 영토보존의 규범은 근대적 국제정치게임을 하기 위한 기본 룰이다.

동북아의 상황을 보면, 현재 두 개의 한국과 두 개의 중국, 그리고 비보통국가인 일본이 있다. 분단국들은 스스로 유일의 주권국이라고 생각하고 통일을 국시로 삼는다. 국가들은 근대적 영토경계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배타적 소유권을 둘러싼 제로섬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무엇보다 향후 서로의 생존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에 휩싸여 과거 식민지배의 역사를 곱씹는 해석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주권 존중의 근대적 규범이 정착되지 못한 상태에서 미래의 불안을 해소하려면 과거를 자신의 해석 하에 담보로 제공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국제정치적 갈등은 얼핏 생각하면 고통스럽기만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갈등 논리에 편승하여 이득을 볼 수 있는 세력도 있다. 각 국의 정치집단은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악화된 국제환경을 활용하여 정권을 창출하거나 유지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또한 상대국의 정치집단이 야비한 민족주의 동원 세력이라고 밀어붙여 자신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국익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요, 동아시아를 공동의 삶의 터로 만들려는 노력을 좌초시키는 비극적 책동들이다.

동아시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첫째,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그 내용을 동아시아인들이 공유하는 것이다. 미중이라는 두 거인들 간의 세력전이 게임, 세계 4강이 모여 있는 동아시아 지역의 강대국 정치 논리, 근대 국제정치의 고질적 안보딜레마 등 근대적 과제에 대한 지식과 성찰이 필요하다.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상당 부분 구조에 숨어있는 원인이 있고, 이를 재생산하고 있는 책임은 공유되어야 한다. 여기에 덧붙여진 근대 이행의 역사적 과제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동아시아인에게 분쟁의 영토란 전통적 삶의 터요, 국가 건설의 자존심이요, 근대 국제정치의 군사경쟁의 핵이다. 다중적 의미를 지닌 게임을 단순한 상호비방게임으로 풀려고 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둘째, 미중 간 협력관계 형성에 사력을 다해야 한다. 만약 2020년대에 들어 미중의 국력이 비등해지고 여전히 군사력을 동원한 경쟁이 심해진다면 동아시아인들의 생명은 미중 간 강대국 정치에 좌우될 수 있다. 과거 모든 패권경쟁은 전쟁을 수반했는 바, 시한이 있는 현재의 미중 간 신형대국관계 협력을 온전한 형태로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동아시아인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 미중 간 전략적 불신을 최소화하기 위한 각 사안별 협력기제 정착에 힘쓰고 이를 확장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 동아시아의 갈등을 국내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움직임을 경계하는 지식인과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결국 문제를 진단하는 것도 이들이며 진정한 국익과 지역의 이익을 일부 정치인들이 이기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이들이다. 이러한 세력들이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정치체제를 개선하고 여론을 호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이들이다.

넷째, 한국의 운명과 역할을 생각해 보면, 동아시아의 평화와 한국의 번영은 직결된다. 해양과 대륙, 미국과 중국,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등 근대 진입 이후 양분되기만 했던 동북아의 지정학 속에서 한국은 지역과 한반도의 이익을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약소국 한국은 지역이 해하는 한반도의 이익과 아픔에 집중했다면, 중견국 한국은 한반도의 문제해결을 통해 동북아를 치유하는 새로운 미래를 건설해야 한다. 단기적 국익도 중요하지만 동아시아 지역을 변환함으로써 결국 한반도를 발전시키는 전략적 성숙함을 실현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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