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돋보기] tvN, 「더 지니어스: 룰브레이커」

카메라가 그들을 비춘다. 표정은 굳고 미간은 좁아진다. 눈동자가 기민하게 움직인다. 뉴런의 가열찬 노동을 통해 사고가 활성화된다. 그들은 이렇게 독백할지도 모른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그러나 카메라는 그들의 머릿속을 촬영할 수 없다. 대신 손을 비춘다. 손은 민첩하다. 쪽지를 전하기도 하고 등 뒤에서 은밀하게 서로 맞잡기도 한다. 감춰진 물건을 찾거나 남의 물건을 숨기기도 한다. 그러니 그들은 또 이렇게 독백할지 모른다. “……하지만 걱정마라.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타짜」, 2006)

「더 지니어스」시즌2가 끝났다. 연예인들이 그들만의 친분으로 비연예인을 따돌렸다는 연예인 연합과 일부 플레이어들의 절도행각(?)에 대한 거센 비난이 일기도 했지만―그러거나 말거나, 케이블 종합 1위를 기록했던 시즌1의 시청률 1.158%를 훨씬 웃도는 1.726%(시청률: 닐슨코리아)를 찍었다니, 시청률이 갑이라는 방송계에서 눈길을 끌만도 하다.

그런데 이 프로, 아무래도 수상쩍다. 시즌1부터 표절 논란이 일었던 일본 드라마 「라이어 게임」이나 만화「도박묵시록 : 카이지」와 달리 게임에 진다고 운명하시거나 엄청난 부채를 떠안게 되는 것도 아닌데 과도하게 치열하다. 게다가 탈락한 플레이어의 탈락 요인을 분석·정리해주는 의미심장한 엔딩 코멘트라니! 마치 인생을 반영한 듯한 이 프로를 열심히 보고 배우노라면 나도 게임의 승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진심으로!

△게임의 법칙,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게임의 법칙「더 지니어스」시즌1의 부제는 ‘게임의 법칙’이다. 그러니까 공식 제목은 「더 지니어스: 게임의 법칙」인 것인데, 그 ‘법칙’이란 것이 매회 제시되는 게임의 진행 방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테니, 잠시 제목의 기원으로 돌아가 보면-영화 두 편이 떠오른다. 르누아르 감독의「게임의 규칙(The Rules of the Game)」(1939)과 장현수 감독의「게임의 법칙 (The Rules of the Game)」(1994)이 그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이 죽는다. 한마디로 비극이다. 그들은 순진했다. 삶이 게임이 되는 순간, 명시적이고 표면적인 룰 외에 암묵적인 이면의 룰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몰랐던 것은 ‘게임의 법칙’이 아니라 ‘무규칙의 규칙’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더 지니어스」참가자들의 플레이는 화려한 권모술수와 합종연횡이 난무한다.
그래서일까? 아예 밑바닥 보여주고 시작하겠다는 듯이 시즌2의 부제는 ‘룰브레이커’이다. 꼭 범죄자까지야 아니겠지만 룰을 마구 깨도 좋다는 신호인 것 같은데, 절도와 폭력은 금지한다는 시즌1의 경고 메시지도 사라진 것을 보면-진정한 룰브레이커는 제작진인 듯! 그러거나 말거나, 룰이 없는 것이 룰이라면 룰보다는 목표가 핵심일 것이다. 승자가 되기 위해 이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임’인 바에야 뭔가 얻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1939년 작「게임의 규칙」에서 승자는 사랑을 차지하고 1994년 작에서는 권력을 유지한다. 그리고「더 지니어스: 게임의 법칙」에서는-돈을 얻는다.

이쯤 되면「더 지니어스」의 레퍼런스 작품인「카이지」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우정이나 구두약속으로 받을 수 있는 건 여행지의 기념품이나 그림엽서, 아니면 추억이라고 부르는 나부랭이 정도지.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건 (…) 돈, 돈밖에 없어.”(역경무뢰 카이지: 파계록편 : 9화) 자본주의 시대 아닌가. ‘-주의’가 경고를 뜻하는 말이 아닌 바에야, 돈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결국 게임의 법칙이란 그냥 ‘돈’인 것이다.

그런데 「더 지니어스」에는 「도박묵시록」의 ‘카이지’나 「라이어 게임」의 ‘나모’가 처하는 극한의 위험이 없다. 플레이어들은 약간의 스트레스와 시간 외에 기회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사회봉사가 아니니 오히려 출연료를 받을 것이다. 그들의 게임은 경쾌하다. 마치 삶이 이처럼 경쾌한 게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게임에 지는 것은 온전히 너의 미숙한 플레이 때문이라고, 시청자 여러분께서도 잘 보고 배우라고. 호기심과 기대로 무아지경에 빠져 시청하는 사이 어느새 신자유주의적 ‘닥치고 경쟁’의 옥타곤 안으로 한 발짝 성큼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쩐다-타짜라도 돼야 하나?

△무승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게임=영국의 대중문화 이론가 스튜어트 홀 은 ‘지배문화에 감염되지 않은 진정한 대중문화란 없다’고 단언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더 지니어스」 역시 승자독식의 지배문화에 감염된 방송일지 모른다-그것도 지독히! 왜 아니겠는가? 게임은 승과 패라는 이분법적 논리에서 비롯한다. 승과 패 사이에 중간은 없다. 무승부란 끝나지 않은 게임에 불과하다. 게임은 끝이 나야 비로소 승패가 결정되며, 거꾸로 승과 패가 결정되면 게임은 끝난다.

물론 시작하자마자 끝나는 게임도 있다. ‘성공이 보장된 쪽에 있다면 게임이겠지만 질 게 확실한 쪽에 있다면 그래도 게임이겠느냐’(J. D. 센린지, 『호밀밭의 파수꾼』)는 볼멘소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진 판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도 개인의 ‘자기계발’이나 현란한 ‘플레이’만 강조하는 이가 있다면-눈여겨 볼 일이다. 사기꾼이거나 성공이 보장된 플레이어일지 모른다!

그런데 홀은 또 ‘대중문화란 지배문화와 하위문화 간의 일상적 투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연예인 연합이나 신분증을 숨겨 게임이 진행되는 내내 플레이를 못하게 한 사건에 대한 시청자들의 격렬한 반응은 양자 간의 갈등이 표면화된 하나의 사례이다. 그들을 향한 시청자들의 비난은 단지 도덕적 잣대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게임이 법칙 이면에 존재하는 ‘룰 없음’이라는 암묵적 룰을 최소한의 예측 가능하고 공정한 표면적 룰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이자 저항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저항은 불안과 공포에 기대고 있다. 잔혹한 승패의 논리가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삶은 그만큼 절박하고 절실하기 때문이다. 성공에 대한 열망과 생존에 대한 공포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참가자들처럼 게임을 잘 하고 싶다는, 혹은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게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혹은 불공정한 게임에 대한 저항감을 동시에 갖게 됨으로써 이중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프로게이머 출신 참가자 임요환의 플레이는 흥미롭다. 그는 줄곧 게임 내 화폐인 가넷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게임을 진행했다. 그가 가넷 제로 플레이를 의도한 것인지 우연찮게 그리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때로는 무릎 꿇고 빌고 때로는 탈락 후보자들 간의 1:1 게임인 데스매치를 거치기도 했지만 언제나 벼랑 끝에서 살아 돌아와 마침내 최종 결승에까지 진출한 것이다. 천재적인 게이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플레이를 가진 것 없는 서민들의 상징적 플레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팬심일까?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저서 『야생의 사고』에서 가후쿠-가마족의 축구에 대해 소개한다. 선교사에게서 축구를 배우게 된 그들은 무승부가 될 때까지 몇날 며칠이고 계속해서 시합을 했다고 한다. 물론 그들이 축구를 게임이 아닌 의례로 받아들였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러나 「더 지니어스」를 보며 자꾸 가후쿠-가마족의 축구가 떠오르는 건 지금-여기 우리의 현실이 위태로울 정도로 치열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 지니어스」는 점차 삶이 게임이 되어 가는 2014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삶을 이분법적 게임의 논리에 밀어 넣는다면 남는 건 승자와 패자뿐, 장구한 인생의 노정 속에서 누적된 의미의 퇴적층과 거기에 깃든 삶의 질감은 사라지고 만다. 혹시라도 우리의 삶이 게임이라는 유희로 해체당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된다. 그러나 「더 지니어스」의 세계에서, 지거나 이기지 않고 살아남을 방법이-있기는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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